작성일 : 18-12-30 15:18
누가복음 강해 31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16  

누가복음 5:33-39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 새 부대.


관리자 18-12-30 15:19
답변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 새 부대

누가복음 5:23-39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 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는 것이 좋다 함이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그 비난의 기준은 세례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의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왜 자주 금식하고 기도할까요?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그 기준입니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세례요한의 제자나 아니면 바리새인의 제자들의 삶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겁니다.

레위기 16:29절입니다.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찌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스가랴 8:19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일 년에 네 번이나 금식하는 날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월 구일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날, 오월 칠일은 여호와의 전이 불에 탔습니다. 칠월 십일은 대 속죄일이며, 시월 십일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4차 침공한 날이며 이 침략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당하게 됩니다.

스가랴 8장은 다리오왕 사년 구월에 기록되었기에 B. C. 518년 구월입니다.
그러니 B. C. 586년에 남 유다가 완전히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니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자신을 괴롭게 하면서 기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금식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면서 기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이 일 년에 사일만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금식이 놀이일까요? 취미생활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금식 기도하면서 무엇을 기다릴까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즉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금식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메시야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금식 기도하는 자신들이야 말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알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메시야를 왕으로 옹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당시 이러한 사회 분위기입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 기도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니 주의 능력이 함께 하는 예수라면 당연히 그 당시 신앙 기준에 맞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미 우리는 교회가 만든 믿음의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당시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태를 보면 여전히 손가락질 할 겁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기도하세요, 전도하세요. 성경 읽으세요. 금식 기도하세요라는 명령을 쏟아 놓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고, 성경 읽지 않고, 금식 기도 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 같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당시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길 때가 아닙니다. 현실이 바벨론 포로 이후 선지자들이 약속한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금식 기도할 때라는 겁니다.

스가랴 8:19절을 다시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앞서 16-17절을 봅시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오려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행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지 않았는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마치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온 것처럼 살고 있는 겁니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 종교적 환경이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가랴 예언이 성취되려면 스가랴 8:13절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이들을 구원하고 축복이 되게 하리라고 하셨으니 그러한 환경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먹고 마시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보게 되면 자기들끼리만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사실은 판단이지요. 심판입니다. 너희들은 지옥 갈 자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잖아요. 그러니 지옥 갈 자와 함께 먹고 마시니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금식 기도와 비교하면서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예수 당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아주 길게 대답하십니다.

지금 세리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지요. 그 잔치를 혼인 잔치로 말씀해 버립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신랑이고 세리와 죄인들이 혼인집 손님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금식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들만 못 알아들을까요?

신랑과 함께 있는데 그 손님에게 금식하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잔칫집에 갔는데 금식하라고 하면 손님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즘도 그렇잖아요. 결혼식에 갔는데 식사가 변변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불만을 쏟아 내잖아요. 잔칫집에는 무엇보다도 먹을 것이 많지요. 잔칫집에 왔는데 손님에게 금식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잔칫집에 왔다는 겁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이 주인공인 그 잔칫집에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일방적 주장이지요. 유대인들 눈에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주변환경의 변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제자들은 신랑을 뽐내기 위한 손님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금식은 언제 해야 하는가?
신랑을 빼앗길 날에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제자들이 지금 예수님과 함께 할 때에는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는 금식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제자들이 뭘 압니까?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무슨 신랑이 빼앗긴다, 신랑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지금 제자들이 뭘 알아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함께 먹고 마시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신랑이 왔음에도 금식 기도하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많이 들은 비유입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새 옷을 찢을 뿐입니다.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이 합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가 새 옷을 사서 그 옷을 찢어 낡은 옷을 보수해서 입습니까? 정신병자야 그러겠지요.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금식 기도해야 된다는 말은 이런 뜻이라는 것입니다.
‘주문한 새 옷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새 옷을 입으면 되는데, 그 새 옷을 찢은 천 조각을 버려야 할 낡은 옷에 박음질 하는 꼴’이라는 겁니다.

이 비유만 말해 버리면 사람들은 ‘당장 새 옷을 입겠습니다.’라고 할 겁니다. 그리고는 낡은 옷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할 겁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은 필요 없다가 되겠지요. 율법은 필요 없다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먼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임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비유를 더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됩니다. 그러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하지요. 발효되는 포도주를 부대가 견디지 못 합니다. 이 비유에서는 낡은 부대를 찢어지게 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것이야 말로 낡은 부대를 터뜨리지 않게 하는 방식입니다. 앞선 새 옷, 낡은 옷과는 차이가 있지요.
구약을 버리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구약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논쟁은 오랫동안 있어 왔습니다. 율법을 폐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율법을 그대로 지켜야 하는가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말씀은 복음은 완전 새로운 부대를 요구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복음은 율법으로는 도무지 담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은 지키면 복을 받지만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이 원리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마땅합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이들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율법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식으로 복음을 이해하게 되면 율법의 본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치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꼴이 되어 율법은 그야말로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율법을 버려야 합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르지요.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만 이 말씀의 의미를 알려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율법은 절대 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두고 율법에 대한 해석을 완전히 달리 해야 합니다.
즉 복음은 어디에 담을 수 있을까요? 바로 죄인들 속에만 담을 수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본래 기능인 모든 인간의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는 그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율법대로 지키면 복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는 인식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가운데 사망이 왕 노릇 하는 사실을 목격하면서도 자신들이 저주 아래 놓여있고, 심판 아래 놓여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 있어서 죄인으로 드러나며,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 축복과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축복과 저주를 주신다는 사실을 율법은 증거하고 있었던 겁니다.

율법을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실 일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알아듣게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닫히게 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의미를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만 그럴까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오늘 분문 말씀을 다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으니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도 여전히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죄인이 되면 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어 버리면, 여러분들은 이미 의인이 되어 버렸기에, 주님의 오심에 부합하지 않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데, 그 새 부대를 죄인으로 보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마음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낡은 부대에 담으려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입니다. 물론 담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들의 사고 방식입니다. 묵은 포도주가 좋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새 포도주가 새 부대를 만듭니다. 그리고 낡은 부대도 만듭니다. 율법에 대해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해석하는 분은 없습니다. 모세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천국과 지옥이 만들어 지고 그 천국에 들어갈 죄인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주님의 이런 창조 사역에 동원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창조하시는 죄인으로 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니 성도의 몸은 어린양의 피만 자랑하는 부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