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12-16 17:39
누가복음 강해 29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36  

https://youtu.be/FjVFHPCbupY


누가복음 강해 29


누가복음 5장 17-26


관리자 18-12-16 17:40
답변  
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 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오늘 여러 배우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바리새인과 교법사들, 오랫동안 중풍병 걸린 자,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 그리고 모든 사람입니다. 교법사들이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니 그들의 성경이해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됩니다. 누구과 맞짱 뜰 정도의 성경해석과 가르침을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맞짱 뜰 성경해석과 가르침을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들 속에 포함해서 이해하면 됩니다.

이들은 갈릴리에서, 유대에서, 예루살렘에서 나왔습니다. 갈릴리 지역 대표, 유대 대표, 예루살렘 대표들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들도 역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는 말씀을 기록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17절에 나오는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갈릴리와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분명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능력은 예수님 입장에서나, 바리새인들이나 교법사들 입장에서나 주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하기 때문임을 동시에 긍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의 함정에 빠집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이 없다면 이 말씀은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4장을 경유하게 되면 이 말씀은 부정과 긍정이 중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 곧 그것은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임을 인정합니다. 홍해를 가르고, 만나를 내리시고,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에서 말씀하신 그 말씀대로 질병을 고치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음을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식입니다. 성경 지식이 이들을 망하게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물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이미 판단이라는 결정권을 인간 몸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조차 이러한 인간의 판단을 위한 기준으로 사용되어집니다.

그래서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예수님이 과연 이스라엘을 위로할 자인지 아닌지를 말씀으로 판단해 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위가 구약 율법에 부합하면 예수를 인정할 것이지만, 만일 주의 능력이 비록 예수님과 함께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율법을 거스린다면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주의 능력조차도 다 마귀의 능력으로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물론 그들이 목격한 능력은 사람에게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능력들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이들에게는 자신들 눈앞에 펼쳐지는 주의 능력조차 얼마든지 부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입니다.

이들은 지금 앉아서 예수님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기할까요? 이들은 포기를 모릅니다. 지붕을 뚫고 병자를 침상 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이들의 간절함은 지붕을 뚫게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지금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중풍병자 고치기 위해서 메고 지붕을 뚫고 달아 예수님 앞에 내린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시는 말씀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실망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중풍병자의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데려 왔습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누구의 믿음을 보셨습니까?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중풍병자를 포함한 그를 메고 온 사람들 모두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중풍병자의 죄만 사합니까? 그들 모두의 죄를 사해야 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꼼꼼히 따지게 되면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사람들은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해결해 보려니 뭔가 서로 이가 맞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면 그들 모두의 죄를 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지 인간 구원을 위한, 인생문제를 위한 성경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씀이 왜 이렇게 불친절한지 아시겠지요. 사람들은 말씀이 자신들에게 친절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시냐? 예수님이 바로 죄하시는 권세가 있는 분임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가를 증거하는 차원에서 믿음이라는 것을 갖고 오셨고 그 믿음과 자신의 죄용서와 연관시키면서 앉아서 예수님을 관찰하는 자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끄집어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동안은 침묵해 있다가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1절).”
주의 능력은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들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말이 옳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누구와 동등이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이 되지요. 물론 유대인들이 보기에 말입니다. 우리야 이미 예수님이 심판 주되심을 알고 있으니 별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 성급하게 결론으로 가지 마시고, 오늘 본문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왜 그러한 말을 하는지를 추적해 봅시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율법 그 어디에도 여호와 하나님 외에 죄를 사하는 권세를 준 적이 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특히 예수라는 인간에게 준 적이 없다는 겁니다. 줄 리도 없지요. 그렇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 되심이 부정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당당히 말은 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한 자라고 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이 마음속으로 하는 말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23절)”
여러분들이 답변한번 해 보세요.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우리야 다 어렵지요. 그런데 기적행하는 교회에 가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일어나 걸어가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쇼를 하는데가 어디 한 두 군데 입니까?
더 중요한 것은 마귀가 뭘 요구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기적을 행해라고 요구했지요. 그렇다면 얼마든지 마귀가 일어나 걸어가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9-10절입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죄용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말로야 얼마든지 죄용서를 한다고 떠들어 될 수 있지만 그렇게 용서한다면 반드시 영생을 줄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인간이 영생을 줄수 있습니까?

그러나 중풍병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것은 이 땅에 있는 자들이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습니다. 절에 다니면서 병을 고쳤다는 간증집이 서점에 가면 얼마든지 사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의 말씀의 의미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의 능력 속에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4절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어디에 주목할까요? 죄 사함의 권세가 예수님께 있는 것에 주목할까요, 아니면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에 주목할까요? 물어 보는 제가 잘못입니다. 죄 사함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죄가 용서 되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 죄용서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요. 몸에 흔적이 있으면 모르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죄 사함의 흔적을 막 찾으려고 하고 만드려고 하는 겁니다. 행위입니다. 즉 자신이 언제 믿었는지를 붙들고 있습니다. 자신의 변화된 행위를 붙들고 있습니다. 몸이 나은 것을 붙들고 있습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면 되는데 육을 갖고 있는 인간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보이는 것으로 그 믿음을 조작해내야 합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 되셔서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이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중풍병자가 나았다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죄 용서에는 관심이 없고 내 몸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자 이제 본문을 다시 봅시다.
바리새인과 율법사의 관심은 율법입니다. 그러니 그 율법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말씀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니 정보 많이 획득하려고 덤빕니다. 그래서 많이 아는 자가 믿음 좋은 자가 되어 버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집단을 가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수와 하수가 있습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는 동네라고 다른 게 없습니다. 많이 아는 자는 고수고 적게 아는 자는 하수라는 겁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현실화 되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와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사람들에겐 어떤 장애물도 장애물이 되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이 인자시오 인자 되신 예수님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분이심을 증거하는 것에는 그 어떠한 장애물도 방해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만나신 후 사도바울의 인생을 보세요.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비천함, 풍부함 그 어떤 상황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 하는데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되신 예수님이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분이심을 증거 하시는 방식입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인자되신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신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말씀이 장애물이 되어 버립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께서 중풍병자와 그를 데려온 사람들을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오도록 하신 것이 됩니다. 이와 함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말씀에 근거하여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게 한 것도 주님이 하게 하신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군상들을 등장시킵니까? 이 세상이 누구의 권세 아래 있습니까? 악마의 권세아래 있습니다. 악마의 권세 아래 있다는 말은 악마와 동일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악마와 동일한 생각을 품고 있는 자들이 어떤 것을 발산시키는지를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말씀대로 기적을 행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입장입니다.

25절을 봅시다.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정말 대조적이지요. 중풍병자였던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와 달리 이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자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심히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오늘날 우리가 기인한 일을 보았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과 중풍병자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였던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찬양하는 겁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주되심을 믿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니 이들과 모든 사람들은 절대 죄용서 받은 중풍병자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막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와 달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주되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관찰자, 구경꾼으로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한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 속에 이들이 포함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얼마든지 구분을 하니까 말입니다. 요한복음 9:24절을 보면 눈뜬 소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광을 누구에게 돌려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죄용서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저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무리들은 죄인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 땅에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분이심을 증거 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살려지고 죽습니다. 그러니 그 어떤 장애물도 장애물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시선, 돈 문제, 권력, 정치, 가정, 남편, 아내, 자녀들, 그 어떤 환경도 오로지 죄 사하는 권세가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만 있음을 드러내게 하기 위한 주님의 조치와 장치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