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10-07 16:54
누가복음 강해 19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5  

누가복음 강해 19

누가복음 3장 23-38



관리자 18-10-07 16:55
답변  
예수님과 하나님

누가복음3장23-38

계보가 나오면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특히 알 수 없는 이름들이 등장하면 더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풀 수 있는 키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작 할 때에 족보를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23절 후반부에 나오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작하시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또 한 가지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가 무슨 뜻인지를 파악하게 되면 족보를 통해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심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끼 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시작하셨다는 것은 심판을 시작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가 어떤 의미인가입니다.
성경이 역사책이라면 이 말의 의미는 요셉의 족보나 마리아의 족보에 대해 사람들이 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24절에 나오는 맛다에서 27절에 나오는 레사까지의 이름들은 성경의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 이름들입니다. 그리고 스룹바벨과 스알디엘, 네리까지는 알 수 있다손 치더라도 멜기에서부터 31절에 나오는 맛다다까지도 역시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이름들입니다.

나단의 경우도 애매하지만 그 위가 다윗이고, 아브라함까지의 이름은 마태의 족보와 일치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름은 구약을 알고 있다면 익숙한 이름들입니다.

그리고 그 윗대는 대부분 성경에 나오는 이름들입니다. 하지만 36절에 나오는 ‘가이난’은 37절에 동일한 이름이지만 다른 세대이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습니다.

구약을 아무리 잘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누가가 말하는 “우리가 아는 대로”라는 말에 쉽게 동의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기 전 족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족보와 관련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가 이미 족보에 대해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족보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였으니 이미 예수님의 족보 연구는 그 당시 다 완료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와 달리 디모데전서 1:4절을 보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면 여전히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싸움이 치열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누가복음에서 에베소에서 일어난 사건을 일소에 해소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기록연대를 보게 되면 A. D. 62-66년경에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어찌되었던 기록 연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복음을 들은 자들이 왜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할까요?
족보의 특징은 항상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나로부터 시작한 족보의 끝은 어디에 닿아 있는가? 누가복음을 보게 되면 하나님과 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가 지금 족보를 나로부터 시작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합니까?
예수님부터 시작하지요.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위가 요셉입니다. 요셉과 예수님과 혈통적으로 관련 있습니까?
없습니다. 단절 되었습니다. 단절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단절되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나님이 혈통적으로 연결됩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여기도 단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가복음을 보면서 예수님부터 혈통을 거쳐 하나님께로 연결하려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과 하나님만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되며 나머지는 피조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담의 혈통을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집어넣었을까요?

아버지의 아들이 오시면 그 사이에 든 인간들은 심판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심판 주되심을 증거하기 아담에서 요셉까지 혈통이 이어졌다는 겁니다. 이 족보는 단순히 예수님의 족보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족보 속에 모든 인간을 다 집어넣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혈통을 따라 오셨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구원도 족보를 따져 보는 겁니다. 이렇게 요즘도 따지는 사람들이 있지요. 우리 한민족이 셈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와 똑같습니다. 족보 따지고 혈통 따지는 이유는 자신이 우수하다는 것이요 자기 구원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말씀을 믿지 못하니 족보로 대체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7:3절을 보면 살렘 왕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합니다.

아비가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가 없다고 합니다.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지만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가 없습니다.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으로 태어 났기 때문이지요. 성령으로 태어 났는데 이 땅 어디에 아비가 있고 어미가 있고 족보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9절에서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이 말씀에 앞서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분리해 보아도 되지만 연결해 보게 되면 족보가 됩니다. 혈통적 족보도 나오지만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족보도 동시에 나옵니다. 곧 ‘나는 누구의 제자다’라는 식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생기지 않으니 믿음이라는 것을 이 땅에서 근거를 마련하려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랬습니다. 이것이 문제지요.

왜냐하면 자신들이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랬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겁니다. 주도권을 자신들이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이들은 말씀을 연구하고 연구하여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를 맞을 준비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말씀연구의 연속성이 가능합니다.

족보를 연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이 주도권을 갖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족보를 언급하게 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합니까?
어느 집안이 훌륭하고 어느 집안이 하나님과 가까운 족보인가가 나오겠지요.

이것은 마치 민수기 16장 사건과 같습니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렸습니다.

그 이유는 왜 너희들만 특별하냐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고라와 함께한 250명에게 향로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두라고 하시면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는 거룩하게 되리라고 하면서 레위 자손들에게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다고 했습니다. 결국 250명이 향로를 취하여 불을 담고 향을 그 위에 두어 회막문에 섰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을 멸하시기 때문에 무리에게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에서 떠나라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켰습니다. 이들은 총회 중에서 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 인도 소멸했습니다.

족보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나의 구원의 확실성 확보도 있지만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과 끝없는 신화와 족보이야기를 대조시킵니다.
따라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은 곧 십자가의 피로 세워진 믿음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기엔 인간의 그 어떤 행위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아들의 죽으심이 믿음을 만드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이 십자가의 피로 이 땅에 완성되어 나타난 현상이 믿음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오직 죄인들만 이 사이에 들어갑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들에게서만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에겐 족보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열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이기에 누가 높으냐를 따지기 위한 격렬한 논쟁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끝없이 격렬한 논쟁만 낳는 끝없는 신화와 족보에 찰싹 달라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족보를 아는데 어떻게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냐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 족보에서 아담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두고 말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의 특징은 거저 주시는 은혜를 모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나온 인물들을 한 묶음 하면 첫째 아담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족보를 하나님 그리고 첫째 아담, 그리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사망이 왕 노릇 합니다. 이들은 사단의 종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인생은 그야말로 소망 없는 인생들입니다. 문제는 이들은 자신의 꼬라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자신의 형편을 안다면 예수님을 믿을 것인데 자신의 형편을 자신이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심판주가 오셔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 세상에 희년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4장16절 이하를 보면 오늘 족보에 들지 못한 가인의 후손들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오늘 족보에서 이들의 족보를 빼는 것이 정당하지 않는가라고 할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선택을 구원을 위한 선택으로 보는 선입관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만드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한 나라를 짐승나라로 만들기 위한 선택입니다.

그 짐승의 나라,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짐승의 나라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주가 되셔서 짐승의 나라에 속한 자들 가운데 십자가의 피로 긍휼을 베풀 자와 강퍅케 할 자를 만드셨습니다.

가인의 족보를 보게 되면 이들은 그들만의 문화와 문명을 만듭니다. 이렇게 함으로 이들은 죽음을 그들 속에서 삭제해 버립니다. 가인이 에덴 동편에 쌓은 성 이름을 에녹성이라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모은 재산이나 기업을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짐승이 되는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이 만일 오늘 족보를 보게 되면 어떻게 해석할까요?
족보를 예수님 중심으로 볼까요 아니면 하나님 중심으로 볼까요?
여러분들은 누구 중심으로 족보를 봅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께 중심을 둡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부터 시작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여호와만을 믿는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기준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로마서 3:21-23절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가 알기로는 이 말씀은 이방인을 향해 하시는 말씀인줄 압니다. 그런데 로마서 2:1절에서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게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유대인들이 누구를 판단했습니까? 예수님을 판단했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 알려 주어도 그들은 그들 앞에 계신 예수님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서 하나님만 섬기는 겁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악마의 종이요 짐승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의 시작은 곧 하나님을 믿는 짐승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심판 속에서 찾아지는 자들이 만들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