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10-06 19:38
누가복음 강해 18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5  

누가복음 강해 18

누가복음 3장 21-22


관리자 18-10-06 19:38
답변  
내 사랑하는 아들

누가복음 3장21-22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대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백성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를 구별합니다.
백성들 모두가 받은 세례를 죄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입니다. 이와 달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러니 죄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없으시지요. 그런데 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십니까?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난 뒤에 백성들도 기도를 했을 겁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는 비교불가입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것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입니다.
인간들은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늘이 열릴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세례를 받지 않으신 분의 기도는 하늘을 열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를 받은 분의 기도만 하늘을 열 수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로마서 6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4).”

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기 위해 오셨음을 보여주는 물세례입니다. 물세례를 받으신 분의 기도로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 그 동편 문이 열렸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7:55,56절을 보게 되면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하지요.
이 내용을 뒤집어 보게 되면 본래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하늘을 여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그 어느 누구도 생명 길로 향하는 문을 열수 없었는데 인자 되신 분이 하늘을 열고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래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신 겁니다.

그러면서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고 하십니다.

시편 2:7절 이하를 보면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7-9).”

이 아들이 왕인데 그냥 왕이 아니라 심판 주입니다.

이 내용을 사도행전에서는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문제는 어느 누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성령 받은 누가는 이 사건을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절에 나옵니다.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래도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고 합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서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인 좋은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들은 입장에서 제 삼자의 자리에서 기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보지도 않았으면서 글을 읽는 자들에게 마치 자신도 그 자리에 있었듯이 글을 쓰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물론 일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기록할 수도 있겠지요. 소설이라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역사라면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요?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역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닙니다.

누가가 지금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직접 눈으로 목격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물세례 받으신 것은 과거 이지만 성령 받은 누가는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분명 누가복음을 기록할 시기와 예수님께서 세례받을 시기와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A. D. 60-63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세례 받은 시기와는 30년 이상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시간을 거슬러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오시면 말씀이 실제화 됩니다.

물세례 받으신 분이 성령을 받으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아들, 곧 시편 2편에 말씀하신 그 아들이 되십니다. 그는 철장으로 열방을 깨뜨리며 질그릇 같이 부수는 분입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도끼 들고 오시는 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도끼 들고 심판 하시는 분이 물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냥 도끼들고 심판해 버리면 안 됩니까?
안됩니다. 왜냐하면 심판 주는 반드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할 자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쇼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세례요한의 물세례 속으로 들어옵니까? 그 세례가 바로 인간의 죄를 가장 깊숙이 보여주는 세례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칩니다.
그러니 죄의 깊이가 가장 깊은 곳으로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겁니다.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 물세례 받으러 오는 자들은 철저하게 자기를 낮춥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서는 자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말씀으로 무장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예수님을 죽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범한 죄를 범치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3:23절을 보면 소득의 십일조를 하는데 어느 정도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가 하면 토지소산이라면 무조건 십일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저들은 의와 인과 신은 버렸지 않습니까라고 하시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성경을 보실 때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수준에서 이해하시면 곤란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 예배, 수요 예배, 새벽기도, 금요 철야기도회, 십일조, 감사헌금, 교회 봉사를 빠짐없이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성경읽기, 기도도 열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다면 외식하는 자라고 할까요 아니면 믿음 좋다고 할까요?
당연히 믿음이 좋은 사람이지요. 이런 겁니다. 복음 열심히 전하는데,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를 향해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화를 벌컥 내겠지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의가 무엇인지 인이 무엇인지 신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것을 소득의 십일조에 합쳐서 말라기 4장에서 말씀하시는 온전한 십일조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온전한 십일조를 하라고 하신 거라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준이 뭔지를 몰라요.
예수님 자신을 두고 믿지 않잖아요. 예수님 앞에 죄인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 그들은 구약에서 말하는 의와 인과 신을 갖고 십일조를 해도 예수님 앞에서는 모두 외식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몰라요. 뭘 모를까요?
자신을 모릅니다.
자신들이 소경된 인도자임을 모릅니다. 자신이 소경임을 몰라요. 그러니 자신들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자임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자신이 아무리 율법을 들여다 보아도 자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러니 자신들 생각에는 율법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있으니 자신들 시대에 말라기 같은 선지자나, 미가 선지자, 스가랴 선지자,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가 나타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기꺼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함이니라(롬 7:13).”

율법이 결국 누구를 죽이게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시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물세례를 받으셨다는 말은 인간들의 그 어떤 행위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예수님의 육신에 죄를 선고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사랑과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사랑해 주시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참 많지요. 예수님이 날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사랑을 부어 주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율법의 요구는 두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사랑입니다. 율법의 마침이 되려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어야 합니다. 그 이루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영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것도 인간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주신 분을 증거하기 위한 사랑이 됩니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원천인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증거 합니다. 성령을 받게 되니 십자가를 자랑치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어떻게 받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주님 마음대로입니다.
성령을 주시는 분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대로는 창세 전에 이미 예정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무엇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길은 차단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2장을 보면 물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신 것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가 나옵니다.
그런데 왜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주님이 되셔야 하느냐에 대해 8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빌립보서를 보겠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주님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되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십니다. 이것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됩니다. 

요한복음 9:39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 모습이 바로 물세례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시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의 실제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