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9-26 01:16
누가복음 강해 17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5  
누가복음 강해 17

누가복음 3:18-20

관리자 18-09-26 01:16
답변  
좋은 소식(복음)

누가복음 3장18-20

복음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을 겁니다.
복음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복음을 좋아할까요? 물론 어떤 단체는 기쁜 소식이라고도 합니다. 아니면 좋은 소식이라고 하지요. 기쁜 소식이라면, 좋은 소식이라면, 복음이라면 그 속에 기쁜 것이 담겨 있고 좋은 소식이 담겨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만일 이런 식의 복음이라면 절에 가도 복음이 되고, 무당에게 점치는 것도 복음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건 아니지요? 저들은 영생이 없고, 우린 죄용서 받아 천국에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과연 이게 복음일까요?

창세기 6장을 보면 노아 홍수사건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5-7).”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복음으로, 기쁜 소식, 좋은 소식으로 들립니까 아니면 나쁜 소식으로 들립니까?
노아 편에 있기에 기쁜 소식으로 들립니까?

그렇다면 내 사랑하는 딸,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아버지, 내 사랑하는 부모가 여호와께서 쓸어버리는 자리에 있다면 그것도 기쁜 소식일까요?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에 이 심판을 면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이 심판의 소식이 복음일까요 아닐까요?

우린 창세기를 보면서 노아와 그의 식구들만 보잖아요. 그런데 노아 주변에 노아의 형제들은 없었을까요? 노아의 부모는요? 성경을 쉽게 봅니다.

마가복음 10:2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항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부자청년이 재물이 많아 예수님의 말씀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 못 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랐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않고 다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 말씀에 ‘아멘’ 한 모양입니다.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합니다. 물론 자신들이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버리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 말에 대한 답변이 방금 읽은 본문입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이유는 영생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내가 원해서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핍박은 내가 원하지 않는데 당하는 핍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단들은 이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이 있지요. 그런데 자신이 원해서 당하는 핍박은 핍박이 아닙니다. 만일 모든 것을 버리고 핍박을 겸하여 버린 것들에 대한 보상을 이 땅에서 받는다고 한다면 이것 못할 인간 어디 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버린 것에 대한 보상이 백배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생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집단에 기꺼이 뛰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지요. 핍박은 자신들이 받는 보상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최고수준의 복음이해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복음일까요?

노아는 이미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복음입니까? 문제는 노아 자신이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아들을 저주합니다. 지옥을 확정합니다. 이게 과연 복음일까요?

우리야 나만 천국가면 되니 내 부모가 어떻게 되든 자식이 어떻게 되든 얼마든지 지옥가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쩌면 노아의 행동이 더 쉽게 받아 들일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이 시대는 나만 행복하면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노아의 아들에 대한 저주는 자기 저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자기 저주냐 하실 분들이 있으시겠죠. 이삭을 누가 죽입니까? 아브라함이 죽입니다. 우리가 볼 때 죽지 않았으니 죽이지 않았다고 하실 분들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네 사랑하는 독자 그를 내게 지시하는 한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시점부터 칼을 내밀어 아들을 잡으려 할 때까지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여기에서 네 사랑하는 독자라는 말이 빠져 있으면 그냥 번제로 드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자기는 죽지 않고 예수님만 죽는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반드시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죽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은 죽지 않고 예수님만 죽는 복음을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쁜 소식, 좋은 소식으로 몰려드는 겁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도 내어 놓으면서 말입니다. 목숨을 내어 놓아도 결국 자기 살기 위한 순교입니다. 그래서 그 순교한 자신이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가려고 하는 겁니다.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아니면 앞서 언급한 백배의 보상을 받을 수 있고 받는 것이 복음입니까?

사람들은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29절에 복음이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이 단어는 좋은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좋은 소식일까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보기엔 그냥 평범한 말씀이지요.

그러나 앞서 세례요한은 복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전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7).”

심판주가 오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복음을 될까요?
자기를 빼고 나면 언제나 복음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심판 속에 들어가도 과연 복음이 될까요?

그래서 그 대표자를 오늘 본문에서 언급합니다.
바로 분봉 왕 헤롯입니다. 헤롯 왕의 죄를 나열합니다.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악을 더한 것이 요한을 옥에 가둔 겁니다.

마가복음 6:17절에 보면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들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여자로 인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왜 요한이 옥에 갇혔는지를 아시겠지요.
책망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재미있는 단어가 나옵니다. 여러 가지로 권하여 말에서 ‘권하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책망’입니다. 책망은 유죄를 선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하다는 단어는 권면하고 훈계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두 단어의 의미가 너무 다르지요.

그런데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두 단어의 의미는 똑 같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왜 백성들에게는 권면하고 훈계하는 것처럼 들렸고, 헤롯에게는 책망으로 들렸을까요?

이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은 좋은 편과 나쁜 편을 나눕니다.
백성들은 좋은 편, 헤롯 왕은 나쁜 놈.

우리는 어떻습니까?

복음의 내용을 모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것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 그분 만이 유일한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 분 손에 천국과 지옥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선행도, 악행도 천국과 지옥을 결정짓지 못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의 복음 전파에 사람들은 어떤 반응이 일어나야 할까요?

두 가지 반은 다 나타나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둘 다 성령을 못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백성들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분노를 내지 않습니까? 돌을 들지 않습니까?

이와 달리 왜 헤롯은 요한을 옥에 가둡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의 위력입니다. 좋은 소식의 위력입니다.
복음은 앞서 말씀 드렸듯이 십자가 지신 분이 부활 승천하셔서 심판주가 되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백성들은 요한의 복음전파에 대해서는 별로 불편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헤롯 왕만큼 나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세례 받으러 오는 사람들처럼 모두가 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이니 기꺼이 회개하고 잘못을 수정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와 달리 헤롯왕은 자신이 심판 주입니다. 어느 누가 감히 심판 주를 건드립니까? 자신이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데 나를 유죄 선언하는 놈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겁니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이 심판자입니다. 심판 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인이라 하지 않잖아요. 어찌할꼬가 나오지 않잖아요. 세례요한의 복음전파를 얼마든지 들어 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니 그들의 반응은 헤롯 왕과 전혀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요한복음7:7절을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하십니다.
여기에서 미워한다는 단어는 몹시 박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게 세상이 예수님을 몹시 박해할까요?
여러분들을 악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좋습니까 싫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말씀대로 살았다고 해 봅시다. 주일날 빠지지 않고 예배 참석하고, 십일조 빼 먹지 않고 드리고, 감사헌금도 때마다 드리고, 기도도 하루에 한 시간 이상하고, 성경도 하루에 열장이상 읽고, 새벽기도 빠지지 않고, 가정예배도 빠뜨리지 않고 드렸습니다. 그리고 돈 벌 때도 양심적으로 남을 속이지 않고 살았습니다.
화 내는 것도 잘 참아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온 사람에게 당신은 악하다고 해 보세요. 아마 죽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악하다라는 말씀의 본래적 의미를 말씀하시지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말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신들을 향해 마귀의 종으로 살아간다고 하니 어느 누가 참겠습니까?

자신에게 헤롯왕과 같은 권력이 없기에 참고 있지, 나름 자신이 갖고 있는 권세를 마음껏 행세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은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이 말씀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왜 그렇게 듣기 싫을까요?

자신들이 누구의 종입니까? 죄의 종입니다. 첫째 아담 안에 살아가는 모든 자들은 죄의 종입니다.
인간들은 몸 둥아리만 있을 뿐입니다. 그 몸 둥아리를 굴리고 다니는 자는 마귀입니다.
원격조정당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이 사실을 인정할까요?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미 악마가 장악하고 있기에 인간을 결코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자를 자신의 피로 자유케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이 너무 싫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유케 되는 것이 좋습니까 싫습니까?
뭘 알아야 싫다 좋다가 되지요.

문제는 인간 자체가 신이기 때문에 이미 자유합니다. 그러니 누군가에 의해 자유케 되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내가 믿고, 복음을 들어도 내가 듣고 판단하겠다는 겁니다.

만일 진리이신 예수님에 이해서 자유케 된다면 누구 소속이 되어 버립니까?
예수님 소속이 되어버리지요.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이렇게 되고 싶겠어요.

난 예수님의 종으로는 살기 싫고 예수님을 믿으면서 살겠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오늘날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꼭 세례요한이 복음을 전할 때 들었던 백성들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헤롯 왕처럼 돌변합니다. 나는 예수님이 종 되려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내가 믿는 복음은 나를 위한 복음이라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살면 이 땅에서 축복을 백 배나 받고, 죽은 내가 천국 간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을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헤롯 왕이 세례요한을 옥이 가두는 겁니다.

복음은 오로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자에게만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주님의 심판 속에서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미 심판 받았고 죽었기 때문에 복음,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종으로 사용하심을 감사할 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그 사랑만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을 언제나 죄인 만드시는 것에 고마워 합니다.

헤롯은 책망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은 책망을 듣기 좋아합니다. 성령의 책망을 감사하게 받습니다. 세례요한이 헤롯을 책망했다는 단어와 요한복음 16:8절에 나오는 책망이 같은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들어가 봅니다.
세례요한이 헤롯을 책망했다고 했을 때 그냥 한번만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책망하다는 단어가 현재분사형입니다. 계속해서 그의 범죄가 폭로되며 책망을 당하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참을 수 있겠습니까?
가끔 설교할 때 한번 정도 책망은 들어 줄 수 있지요. 그런데 지금 십자가 복음을 알고 있고 나름 막 살고 있는데 쉬지 않고 책망이 들어와 보세요. 

천부께서 심지 않는 자는 다 뽑힙니다.

성령의 책망이 이렇습니다. 세례요한이 성령의 책망을 앞당겨 보여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심판 주의 택함을 받은 자는 날마다 그 책망 가운데 죄인으로 드러나고,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는 것에 감사한다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쉬지 않고 책망하시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을 안 읽는 겁니다. 말씀을 안 들으려고 하지요. 물론 듣는 말씀도 자기 마음에 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책망 받는 설교는 듣기 싫어합니다. 자신이 왕 행세 하도록 해주는 성경구절, 설교만 들으려고 하는 겁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이 기쁜 소식은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곧 주님과 함께 죽은 자들에게만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만 기쁜 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