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9-16 15:17
누가복음 강해 16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68  

누가복음 강해 16


누가복음 3장15-17


관리자 18-09-16 15:18
답변  
성령과 불세례

누가복음 3:15-17
유대인들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베풀고 있으니 요한이 혹 그리스도가 아닌가 심중에 의논하였습니다. 심중에 의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지요? 제가 탕자교회 홈페이지에 저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글을 올려 놓았습니다.

제가 그런 글을 올려놓는 이유에 대해 심중에 의논하지요. 저 사람이 왜 자신에 대한 비판 글을 올렸을까? 자기가 맞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가? 아니면 무슨 의도가 있는가?

성령 받은 사람의 관심은 누가 맞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저를 비난한 사람이 저의 심판 주 사상을 볼 때 십자가의 피 공로를 훼방한다고 느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비난할 수 있어요. 심판주라는 용어를 갖고 와서 사람들을 급박해서 예수 믿게 하고 교회 나오게 하고 헌금 하게 하고 봉사하게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자기 영광 받기 위해서 그런 용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인간이 이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도피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육이 있는 한 인간은 결국 자기 몸 중심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러니 주님이 이 육을 죽이시는 겁니다. 주님은 죄인을 갖고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이 육이 죽기 전에 성도는 이미 죽었지요. 그런데 죽었다고 하니 사람들은 오해를 해요. 이제 난 더 이상 내 이름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나는 십자가를 아니 난 나를 위해 살지 않아요. 나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증거하기 위해 산다고 주장합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자체가 이 주장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모르면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살아나서 심판주가 되지 않으셨다면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지금 심판주로서 친히 모든 일을 행하고 계시기에 모든 인간은 주님의 주되심만을 증거하도록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주되심이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이기 때문에 주님의 활동은 항상 십자가 사건의 실제화입니다.

로마서 8:12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저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도대체 무슨 빚을 졌다는 겁니까?
육신에게 저서 육신대로 살아버리면 빚진 자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용하는 동사의 시제가 현재입니다. 즉 성도는 항상 빚진자라는 겁니다. 그 빚진 자라는 사실은 육신에게 저서 육신대로 살지 않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것도 현재시제로 말입니다.

좀 더 보겠습니다.
13절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여기에서 살면, 죽을, 죽이면, 살리라가 동사입니다. 여기에서 살면, 죽을 것, 죽이면은 현재시제입니다. 살리라만 미래시제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불쾌한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왜냐하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았다는 교리를 알고 있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자들에게만 오늘 본문이 해당사항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까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현재 영과 육의 싸움이 진행되는 자리가 성도의 몸이라는 겁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는데 왜 현재 죽을 몸을 두고 영과 육이 싸우는 싸움의 현장으로 만드실까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영과 육의 싸움은 성도의 싸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도의 몸을 두고 성령과 악마가 싸움을 하는 겁니다. 물론 그 악마는 인간이지요. 몸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는데 왜 이런 싸움을 현재형으로 펼치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택하심을 입었기 때문에 당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택함을 입었기에 싸우는 현상일까요?
그 택함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주를 증거 하기 위한 택함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이 증거 되려면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몸을 싸움의 현장으로 만드는 겁니다.

누가 이길까요? 육이 이깁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겁니다. 이런 자가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자로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하시는 겁니다. 몸으로 나오는 것은 육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몸을 영으로 바꾸는 작업을 성령께서 십자가를 통해 하시는 겁니다.

1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도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단순히 가이드 역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끌고 다니십니다. 그들은 반드시 십자가만 자랑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세상 임금에 대해서 책망을 성도의 몸에 쏟아 붓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도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이 현재시제입니다.

제가 왜 시제를 언급하는지 눈치채신분이 있을 겁니다.
그 이유는 심판주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시간의식은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왜 과거 현재 미래를 만들어 내는 지는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겁니다.
구원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승리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시간을 없애 버렸습니다. 시간을 창조하신분이 시간을 없애 버렸지요. 이렇게 말하면 지금 시간이 가고 있지 않느냐고 할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 시간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일 년전에 30년 전에 십자가 복음을 알았다는 것이 지금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에게 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미래가 어디 있습니까? 현재도 순간입니다. 현재라고 하는 순간도 금새 지나가 버립니다. 과거가 있다면 현재 구원이 될 것이지만 현재만 계속 반복 되었는데 어떻게 과거의 믿음이 현재 자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왜 자꾸 과거 신앙 경험, 쌓아온 신앙 지식을 자신의 믿음과 결부시킬까요? 그 이유는 역시 자기 구원 확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을 인간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그 구원은 주님 소유입니다. 그래서 그 구원이 무엇인지 보여 주라고 시간이 회수되었지만 시간 속에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나누기입니다. 동일한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성도는 심판 주 되신 주님의 긍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아닌 자는 주님의 긍휼로 순간순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 지식과 신앙 체험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겁니다.

제가 잃어버린 믿음을 찾아서라는 글을 썼지요. 주님께서 동사를 현재형으로 사용하시는 이유는 주님이 지금도 친히 홀로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 사건의 실제화를 통해서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자신들이 구약, 즉 과거 말씀을 갖고 얼마든지 확인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구약은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누구를 기다리고 누구를 믿어야 할지를 알려주는 길잡이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근거로 해 볼 때 세례요한이 이사야 40장에서 예언된 광야의 소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좀 부족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일까 아닐까를 의논하는 겁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이들이 심중에 의논하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이 이들이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 대답해 줍니다.

16절입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신발 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세례는 물세례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겁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뒷 부분에서 설명합니다.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죽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유대인들은 이 말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자신들은 알곡으로 나머지는 쭉정이로 갈라 낼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세례요한조차 이 말씀의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모릅니다. 구약에 속했기 때문이지요.

성령과 불로 주시는 세례는 먼저 예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물세례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세례를 받으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일이 불세례(눅 12:50)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성령세례를 받은 분으로서 불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분이 살아 나셔서 주가 되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십니다.

사도행전 1:5절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불세례는 어디로 갔을까요? 불세례는 성령세례 안에 함유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3-4절입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에 성령세례와 불세례가 나옵니다.

놀라운 것은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였다는 겁니다. 이것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갈라지는’ 이라는 단어는 ‘조각조각 내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성령 받은 자들이 말을 하게 됩니다. 무슨 말을 할까요?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쪼개는 말을 합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활동이 성령 받은 자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12-13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성령의 말씀입니다. 성령의 말씀은 인간을 조각조각 냅니다. 이 조각은 먼저 자기 백성과 아닌 자를 갈라 버립니다. 이것이 불 심판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도 조각 조각 내 버립니다. 이것 또한 불 심판입니다. 성령이 임하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자만 불세례를 받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지 못한 자들은 쪼개짐이 없습니다. 로마서 8장을 현재로 말씀드린 이유를 아시겠지요.
만일 성령의 활동이 예수 믿을 때 멈추어 버렸다면 쪼개질 이유가 없습니다. 상한 심령이 될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는, 성령께 끌려 다니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성령께 끌려 다니는 몸은 영으로서 육신의 행실을 죽이는 현장이 됩니다.

손에 키를 들고 알곡과 가라지를 분류해서 알곡은 모아 곡간, 천국에 넣고, 가라지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하니 유대인들은 얼마나 신이 났을까요?
지난 주 살펴 보았지요. 죄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그냥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낮추고 또 낮추어서 받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합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십자가를 믿습니다.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니 자신들은 당신이 알곡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성도는 손에 키를 들고 계신 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알곡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알곡과 가라지가 나누어지는 현상이 성도 몸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성도가 아닙니다.

자기 구원을 위한 예수님이라면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내 몸을 영과 육의 싸움의 현장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은 빠지며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심판주가 되셨음을 증거하 기 위해서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에 끌려 다니는 몸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날마다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나 악마는 십자가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싸움의 현장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구경꾼의 자리에 둡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의논합니다. 누가 옳을까?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면 자신의 몸이 영과 육의 싸움판이 되어 버리고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는데 이런 자는 누가 옳을까에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처럼 누군가 분명하게 뭔가를 이야기 해 줬으면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아무리 분명하게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성령은 십자가 지신 주님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 주십니다. 그들에게 자기 자랑 못하도록, 십자가만 자랑하도록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해 버렸습니다. 이런 자들만 받게 되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의 견해, 의견, 이론을 바탕으로 누가 진짜일까, 아니면 가짜일까를 생각한다는 자체가 받은 것이 없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분명히 소개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 뜻이 분명히 몰랐다고 칩시다. 그러나 누가는 그렇지 않지요. 지금 분명히 소개합니다. 그런데 누가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정답이지요. 믿는 자가 있다면 성령께서 끌고 다니실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끌고 다니시면서 육을 쏟아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고백을 하게 만들어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