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5-13 20:00
골로새서 강해 67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35  

골로새서 강해 67

골로새서 4장15-16


관리자 18-05-13 20:00
답변  
형제들
골4:15-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라오디게아와 13절에 나오는 히에라볼리는 골로새와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에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라오디게아와의 거리는 19킬로미터 정도, 골로새 서북쪽에 위치한 히에라볼리는 2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풍요로운 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A.D. 60년이나 61년경쯤 지진으로 이 도시들이 삼류도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철저하게 가정 중심입니다. 심지어 사촌만 되어도 벌써 거리감이 있는 사이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여기에 무엇인가 개입이 되면 사촌이 아니라 사돈의 팔촌까지도 혈육으로 인정받으려고 하고 인정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돈입니다. 물론 돈에는 권력이 함께 묻어 있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혈육을 벗어나면 그 돈의 흐름이 끊어집니다.

요한복음 1:13절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

혈통과 육정의 특징은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입니다. 혈통 즉 핏줄은 반드시 육 즉 savrx의 의지를 따라 움직입니다. 

세상에서 혈통 없는 자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 북쪽에서 백두혈통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다 족보가 있지요. 그 혈통을 육의 의지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결혼하면 집안분위기에 따라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른 모습을 보게 되잖아요. 그래서 좀 살다가 마음에 안들면 헤어지자고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핏줄은 헤어질 수가 없지요. 호적에서 빼도 혈통은 혈통일 뿐입니다. 이 혈통을 따라 올라가면 누가 나오는고 하면 아담이 나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후손들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혈통에서 나오는 육의 의지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어디를 가지 않습니다. 육의 의지의 지향점은 자신이 하나님되기입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가풍이 있는 겁니다.

법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피조물은 피조물 행세를 해야 하는데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은 더 이상 피조물이 아니라 겸손을 가장한 하나님 행세를 하는 겁니다.

이런 혈통으로 만들어진 자들을 형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 형제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형제입니다. 남 북 이산 가족들이 왜 그토록 보고 싶어 합니까? 그것은 자신도 몰라요. 형제기 때문에 부모자식이기 때문에 무조건 보고싶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감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이 어떻게 지옥을 받아들이고 천국에 들어가 살 수 있겠습니까?
천국은 혈통과 육의 의지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교회 다니는 가정에 누가 돌아가시면 목사들이 가서 천국가서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분명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과 육정이 부정된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땅의 혈통을 천국까지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니 천국 백성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요.

얼마나 철저하게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했으면 복음을 들으면서도 죽어도 내 아내는 못 버려, 죽어도 내 자식은 천국가서 볼거야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오게 되면 신앙생활도 다 자기 가족중심입니다.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분명 하나님께로 난 자들의 모임이 교회인데 이것도 백두혈통이 있는 모양입니다. 자기 집안은 대대로 믿음 생활하는 백두혈통이라는 겁니다.

창세기 18:16절 이하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 후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할 것을 알려 줍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열심히 기도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할까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할까요? 아닙니다. 자신의 혈육인 롯과 그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의인 오십명이 있어도 멸망하시겠습니까 라고 하지요. 그러다 사십오, 사십, 삼십, 이십, 십인까지 낮추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그곳엔 의인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꼭 우리 같지 않습니까? 내 아들만은, 내 딸 만은, 내 아내만은, 내 남편만은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롯이 구원받은 것은 롯이 잘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것을 이루려 함이니라(창18:18-19).”

이 이유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소식을 알려 주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혈과 육을 따라 정성을 다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롯의 구원은 혈과 육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언약 때문에 구원을 받습니다.

롯을 지체합니다. 왜 지체합니까? 가기 싫으니 꾸물거리는 겁니다. 그래서 강제 탈출 시킵니다.
문제는 롯의 아내입니다. 분명 뒤돌아 보지 말라고 했으면 뒤 돌아 보면 안 되는데 뒤돌아 보다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성경이 참으로 어렵지요. 탈출이 항상 이중적입니다. 한번 탈출해서 구원되었다고 하면 되는데 꼭 두 번 탈출을 시킵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는 과정을 반드시 겪게 하십니다.

이렇게 말하면 왜 주님은 그렇게 번그럽게 이중으로 일을 하느냐고 할 겁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기 위한 구원임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혈과 육을 배제하기 위한 구원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두 단계를 거치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 롯의 처나 다른 사람의 목을 김성태 국회의원처럼 깁스 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시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혈과 육정의 생각일 뿐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혈과 육의 의지로 자식이 태어날 수 없게 하셔 놓고 이삭을 주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골로새, 라오디게아, 그리고 히에라볼리에 있는 사람들을 형제들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정보만 주어지면 그 정보를 갖고 흉내내기 바쁘지요. 그래서 형제님, 자매님 이라고 불러대는데 이건 형제님 자매님 부른다고 형제되고 자매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9절을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도바울은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살짝 보여줍니다.
히에라볼리에 있는 형제를 소개합니다. 눔바입니다. 눔바를 소개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 문안하고’라고 합니다.

우리도 지금 집에서 모임을 하고 있지요. 집에서 모임한다고 누가 뭐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그런 곳도 있지요.

당시 로마 황제 숭배 하에 핍박이 심한 상황에서 자기 집을 교회모임 장소로 내어 놓는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로마서 8:35-36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지금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이나, 히에라볼리에 있는 성도들이나, 라오디게아에 있는 성도들이 이 말씀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편지를 너희가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고 합니다.

우리들인 골로새서를 살펴 보았지만 골로새서를 읽으면서 이 세상을 사는데 나에게 도움되는 말씀 한 구절이라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혈과 육을 부정하는 내용만 가득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해를 합니다. 눕바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하니까 눔바 집안 사람들은 다 구원받았을 것이다라고 상상합니다. 왜 자꾸 그런 상상을 합니까? 육을 버리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골로새서를 읽으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공부하면서 인간들은 혈과 육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혈과 육을 더욱더 강화합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이라고 할 때 혈과 육정 중심인 인간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 그게 그렇지. 그래 예수님의 피로 사신 형제들 맞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지금 무슨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영적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혈과 육정으로 난 자들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감옥에 갇힌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자들이기 때문에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사도바울 홀로 이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 모두가 다 이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형제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들을 형제로 부르신 이유는 아들을 증거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이 세상에 있는 혈과 육정으로부터 조롱 받고 미움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예수님조차 이런 일을 당했는데 그의 영을 받은 자는 그 미움을 받지 않을까요?
눔바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신의 육체에 채우는
여인입니다.

로마서 8:9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말은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자기 백성에게 임하시는 겁니다.

혈통과 육정을 증거하라고 성령께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치열한 싸움 속에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주변을 둘러 보세요. 형제들이 맞습니까?

마귀는 끊임없이 혈통과 육정을 바탕으로 한 가정을 꾸미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 자식이 잘 되기만을 소원 하고, 내 남편 내 아내가 건강하기만을 소원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너의 형제는 혈통과 육정 외에는 없음을 인식하게 합니다.

내 것을 다 잃어 버리면 무슨 소용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난 자들, 성령으로 난 자들은 반드시 혈통과 육정이 부정 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자요 심지어 자기 가족으로부터도 원수취급 받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