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5-06 19:57
골로새서 강해 66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65  
골로새서 강해 66

골로새서 4:14  데마

관리자 18-05-06 19:57
답변  
데마
골로새서 4:14

디모데후서 4:10절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골로새서를 기록한 시기는 61-63년 정도라고 합니다. 디모데 후서 67년 정도라고 합니다.

길게는 6년 짧게는 4년 사이에 데마가 사도 바울을 버렸다는 겁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예정론입니다.
한번 택함 받은 자는 절대 버려질 수 없다는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리 없는 교단이 없습니다.

구원론 중심인 한국교회 전체가 이 교리를 믿습니다.

유명한 가수 박진영씨가 구원파라고 언론에 조명을 받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일이 며칠 전에 있었지요.
물론 자신은 구원파가 아니라고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박진영씨가 간증하는 내용을 보면 기존 교회에서 다 가르치는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에게 띵똥 택배 배달 오듯이 구원이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다니엘서를 언급하면서 미래의 예언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믿게 하기 위해서 예언을 하셨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천국가면 진영이를 칭찬한다는 겁니다.

저는 통합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통합교단에서 다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합동측이나 고신이나 합신이나 뭐 다를게 없습니다.

박진영씨의 간증은 모순입니다. 구원이 띵똥 온 것과 예언을 통해 믿어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띵똥 오게 되었다는 말은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믿음과 상관없이 거져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믿게 하기 위해서 예언을 주시고 예언대로 이루셨다는 말은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아니면 구원을 주문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요청으로 구원받았다면 그 구원은 악마가 준 구원일 뿐입니다.

세뇌 받아서 그런 겁니다. 나름 음악에 대해서는 천재성을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종교영역으로 넘어가면 박사가 되었던 교수가 되었던 교사가 되었던 모두 다 바보가 됩니다. 생각을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저들은 종교영역으로만 넘어가면 무지해 질까요?

그 이유는 이 세상 신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제대로 전하면 그들이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니 당연히 받아 들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절대 안 받아들이지요. 그것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7:36절 이하는 보면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이 사실을 알고 향유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여기에서 ‘죄인인 한 여자’라는 표현은 바리새인들 입장에서 규정하는 죄인입니다. 이 말은 곧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식사 초대한 바리새인이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 7:39).”

예수님을 초대 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선지자는 엘리야 같은 선지자를 생각합니다. 그들의 입장은 선지자들이 와서 말한다면 자신들은 선지자의 말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약을 몰라도 너무 모르지요. 아합 왕이 엘리야의 기적을 보지 못해서 안 믿었습니까? 경험이 부족해서 강퍅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강퍅케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그것을 몰라요.

자신들이 하나님과 일대 일로 마주 앉아 함께 주고 받고 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면 그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비유를 들어 질문합니다.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 진가 있는데 둘 다 값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채주가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둘 줄 누가 더 채주를 사랑하겠는가?”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시몬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을 받은 자니이다.”

사람들이 이 성경말씀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사람은 반드시 해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말씀대로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속에 뭔가 들어 있습니다.
마귀가 들어있든지 아니면 성령께서 계시든지.

사람들은 이 본문을 보면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래 나는 많이 탕감받은 자 일 거야’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죄가 사함을 얻었느니라.” 많은 죄가 사해졌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저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라고 합니다.
우리 같으면 ‘메시야시니 죄를 사하는 것 아니냐? 그것도 모르느냐?’ 할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들이 생각하는 죄가 뭘까요? 이들은 창녀짓 하는 것을 죄로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말씀대로 살지 않은 것을 죄로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죄를 모릅니다. 왜 죄를 모를까요? 그 이유는 십자가의 영이 이들 속에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여자에겐 십자가의 영이 임해 버리니 자신이 십자가의 원수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창기 짓이 죄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가 죄임을 알게 된 겁니다.

이 사실을 무슨 수로 인간이 알겠습니까?
배워서 인정한다고 한들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겠습니까? 그럴 것 같으면 성령을 왜 주십니까?
성경만 주셔서 성경공부해서 깨달아서 믿게 하시면 되지 왜 성경 따로 성령 따로 주시느냐 말입니다.

심판 주 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셨다는 말은 모든 인간의 입을 막아 버리기 위한 조치입니다. 입을 막게 되면 그 입 막힌 자들은 십자가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무슨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경 예언을 주시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내가 천국가면 진영아 너 참 수고했고 잘했다 칭찬들을 생각하겠습니까?

천국엔 자기 이름 갖고 못갑니다. 예수님의 이름만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왜 저들이 그렇게 전도에, 성경공부에 열심을 냅니까?  그 이유는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의 마음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칭찬받고 싶은 겁니다.

그렇다면 데마는 왜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습니까? 왜 사도 바울을 떠났습니까?

여기에서 세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지요.
요한복음을 보게 되면 세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도대체 왜 데마는 사도바울을 버리고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을까요?

이 세상의 특징은 자기 이름이 영광 받는다는 겁니다.
창세기 11장에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의 목적이 나옵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으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왜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위해 살아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로봇입니까? 그러니 힘을 합쳐 우리 이름을 위해 우리가 열심을 내자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은 죽임당한 어린양과 그 아버지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진다는 겁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0-11).”

우리들이 골로새서를 계속해서 보고 있지요.
골로새서를 알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이 면류관은 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것입니다’라는 의미로 던져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아들을 위하여 자신이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그 어디에도 인간의 이름이, 인간이 영광 받는 자리는 없습니다.

데마가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사도바울을 따른 이유는 자기 영광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십자가만 증거합니다.
감옥에 갇힌 것 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그 다음에 뭔가 보상이 와야 하잖아요.

바울과 함께 있다가는 자기도 죽을 판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기 이름이 영광 받을 만한 곳으로 떠나가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골로새서에서나 빌레몬서에서 데마 자신의 이름을 언급해서 기분이 좋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름이 언급된다고 현실이 바뀝니까? 이름이 언급된 만큼  자신은 십자가 앞에서 부정되어야 합니다.
어느 인간의 힘으로 자기 이름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노골적으로 자기 이름을 긍정하는 복음을 마구마구 쏟아내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환영합니까?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은 자신이 선지자로 여기는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서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예수님을 초대한 자가 죄 용서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와 달리 초대하지 않는 죄인인 여자가 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왜 이런 식으로 죄인을 구원합니까?
왜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 자기 시간 드리고, 돈 드리고, 정성 드려서 초대한 바리새인에게는 사랑을 베풀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죄 용서란 용서하신 분의 공로를 드러내는 죄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눈꼽만큼이라도 들어가게 되면 홀로 영광 받으시겠다는 주님의 의도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초대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서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자발적으로 초대한 자는 절대 천국이라는 곳에 갈 수 없음을 죄인인 여자를 불러서 그 간격을 더 크게 벌려 버리시는 겁니다.

여기에서 처음 말씀드린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실상 구원이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만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미리 아신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자를 영화롭게 하는데는 조금의 착오도 없습니ᅟᅡᆮ.

그런데 데마를 보게 되면 착오가 생긴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6:4-6절을 보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슴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예정론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나 로마서 말씀과 상충이 되는 것 같지요.
그 이유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과 주님이 생각하시는 구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차질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구원중심으로 이 말씀들을 이해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짓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는 죄인이라고 하지요. 자기가 한 것이 없이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 자기 구원중심임은 얼마가지 않아 다 들통납니다. 그래서 이들은 십자가는 과거로 돌려 버리고 철저하게 부활의 능력을 외쳐되기 시작합니다.

이들 입에서 십자가의 피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들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성령님입니다.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잖아요. 그가 데살노니가로 가서 뭘 했을까요?
교회 만들었을 가능성이 백프로입니다. 우린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으니 돈을 벌고 방탕한 생활을 했을 것이라 예상하겠지요.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생각입니다.

교회만들어 이 세상을 사랑하는 모습을 본격적으로 보여 주는 삶을 산 것입니다. 제가 왜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지 아시겠지요.

오늘날 교회가 이 세상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데 교회가 예수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더욱더 사랑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헌금을 아끼지 않습니다. 시간도 아끼지 않습니다. 심지어 명문대학도 아끼지 않고 그냥 던져 버립니다. 가족들도 쉽게 부정해 버립니다.

오로지 자기 영광 자기 이름을 위해서 말입니다.

주님의 용서함이 찾아오면 감사가 넘치며 십자가만 자랑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