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4-16 19:55
골로새서 강해 63 마가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76  

골로새서 강해 63 마가

골로새서 4:10


관리자 18-04-16 19:56
답변  
마가
골로새서 4:10
바나바의 생질 마가도 문안합니다. 그런데 마가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을 합니다.
마가가 도착하면 영접하라는 명령을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내렸다는 겁니다.

마가라고 하면 마가 복음이 떠 오르지요. 바로 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2:12절에 보면 마가라 하는 요한이 나옵니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으로 요한은 히브리식입니다.
사도행전 13:5절을 보면 마가 즉 요한이 바나바와 사울의 수종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3:13절을 보면 함께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사도행전 15:37절 2차 전도여행 출발을 앞두고 바나바와 바울의 의견이 갈립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했지만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마가는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를 굳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마가가 왜 밤빌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는지가 밝혀집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가를 함께 데리고 갈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바나바는 함께 데려 가기를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누가 옳습니까? 바나바가 수준이 더 높은 것 같지요. 우린 성경을 보면서 옳고 그름을 따질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사건을 발생시켜서 오히려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이용하십니다.

나누어 져서 복음이 두 갈래로 전파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의문이 들잖아요. 그렇게 싸워놓고 가서 하나되라는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라고 말입니다.
이들을 부르신 것은 이들이 완벽하게 살아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증인되라고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들처럼 막 싸움을 해도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물론 바울과 바나바가 그것까지 계산하고 싸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싸움이 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던 마가가 이런 사람입니다. 골로새에 사는 성도들도 이러한 소식을 다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젠 바울이 마가를 인정하고 있지요. 함께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했던 모양입니다.
베드로 전서 5:13절을 보면 베드로가 마가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가가 바나바, 바울, 베드로 등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마가가 한번 배반을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또 한번 배반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히려 이런 마가를 영접하라고 합니다.

골로새 교인들 정말 골치 아프겠지요. 편지 내용 하나하나가 결코 자신들이 쉽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나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마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행위를 봅니다. 그래서 그 행위를 보고 그 사람이 됨됨이를 판단해 버립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경유해 그 사람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은 주님의 피가 덮힌 사람입니다.

물론 바나바가 무작정 마가를 데려가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가가 주님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입장에 있기에 함께 데려가고자 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마18:22).”

천국은 죄인들이 가는 곳입니다. 의인은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통해 천국은 십자가의 피만을 증거할 수 있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임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도 이 일로 인해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물론 바나바도 마찬가지고요.
주님은 결코 손해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혹시 저 사람이 우리모임에 와서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번 배신했던 사람들은 아에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마가가 복음에서 떠났습니까? 그 사이에 떠났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전히 복음으로 돌아 왔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바울과 함께 하지 않고 바나바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좀 과장해서 말씀드리면 이런 겁니다.

우리교회에 오다가 다른 교회로 갑니다. 그 교회도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해 매우 안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늘 자기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복음 전하는 목사가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나에게로 와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복음을 전한다면 그 사람이 진정 복음을 전하는 사람일까요?

아니지 않습니까? 왜 사람들이 자기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까?
주님 중심으로 모이면 되잖아요.
왜 꼭 나와 함께 해야 합니까? 그럴 이유 없잖아요.

주님은 바나바와 바울을 심하게 싸우게 해서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만들어 복음전하는 자로 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니 다시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린 앞날을 모릅니다. 지금 크게 다투고 헤어져 다시 하나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몰라도 됩니다. 우리가 왜 꼭 그것을 알아야 합니까? 복음만 전하면 됩니다.

골로새서를 보게 되면 골로새에 사는 성도들 중심이 산산히 깨어져 조각나는 느낌입니다.
철저하게 십자가 피 중심으로 묶어 버립니다.
십자가의 피가 없는 자들은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는 말씀만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분명 골로새서 3: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라고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너나 잘해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왜 사도행전 15장에서 바울이 바나바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쓴 글에 의해 자신이 공격 받는 꼴이 되잖아요. 그렇습니다. 자신이 자신에게 공격하는 것이 복음 전파자의 자세입니다. 그래야만 십자가의 피가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리 이 말씀을 집어 넣어도 안 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옳다는 겁니다. 마가를 데려가면 사기만 떨어질 뿐이고, 또 언제 우리를 배반할지 모르니 저런 사람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죄인답습니까?

이렇게 막 살면 되는데 우린 너무 완벽하게 살려고 해요. 이렇게 하면 주의 뜻일까요 저렇게 하면 주의 뜻일까요? 물론 묻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늘 죄를 안 지으려고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나 바나바처럼, 마가처럼 죄를 지어주면 십자가의 피를 증거할 수 있는데 우린 모두 너무 의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해를 하지요. 십자가 복음을 알면 뭔가 다른 삶을 살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니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짜증 내고 분노 내고..

제가 이렇게 말하면 꼭 이런 사람이 나옵니다.
그렇지요.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내가 화 내고 분노 내고 짜증내는 것도 괜찮다는 말이지요.

지금 제가 그런 이야기 합니까? 그게 죄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끼를 못 알아 듣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십자가의 원수 짓이라는데 자꾸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죄를 지으라고 하니 죄를 짓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찾는 사람은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을 찾습니다.
이 사람은 일평생 자신이 용서 받았다는 증거물을 담고 살아갑니다.
그 증거물은 다름 아닌 죄라는 증거물입니다.

십자가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열왕기 13:1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이 사람이 여호와이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이 벧엘 단, 황금송아지 모셔 둔 단에서 분향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말합니다.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왕하 13:2-3).” 그리고는 예조를 듭니다.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여러분이 이 본문을 읽으면서 답답해 한 적이 없습니까?
만일 여러분이나 제가 하나님이라면 여로보암을 그냥 꽉 죽였을 겁니다.

그런데 왜 이름도 기록하지 않은 선지자를 여로보암에게 보냅니까?
왜 그러한 예언을 하고 예조를 말합니까?

여기에 대해 여로보암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지요?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아직 말이 끝나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여로보암이 단에서 손을 펴서 저를 잡으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장 앞서 말한 예조대로 단이 갈라서  재가 단에서 쏟아졌습니다.

미리 예조를 보여 주었다면 손을 내밀어 잡아라고 했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이런 사건의 순서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 구원 중심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것은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왕은 솔로몬이 성전은 건축한 후 기도한 내용을 완전히 잊었습니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만 하면 죄를 용서하신다고 하셨는데 여로보암은 철저하게 성전을 외면합니다. 이름 모를 선지자의 하나님과 자신의 하나님을 나눕니다. 이렇게 말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은 스스로 우상숭배자임을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자기 죄를 아는 게 아닙니다. 자기 죄를 안다면 성전을 향해 기도했겠지요.
여로보암 왕은 당장 지금 자신의 손이 성하게 되는 것이 중요했던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즉 성전은 노골적으로 무시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왕의 요청을 왜 선지자가 들어주고 여호와께서 손을 성하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망할자는 망해야 함을 알려 주시는 차원에서 그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손이 말랐다가 성하게 되었으면 정신을 차렸을 것이라 생각하지요.
인간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에겐 그렇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로지 언약을 이루는데 동원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새 언약, 즉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 사용되어지는 증인들입니다.
여로보암 같이 우린 철저하게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도를 그냥 두시지 않고 마구 흔들어 댑니다.

제가 어릴 때 박사동이라는 곳에 살았는데 그곳에 가면 소나무 몇 그루가 있는 곳이 있습니다.
물론 무덤도 있지요. 산은 아닙니다. 그의 매일 그곳에 가서 놀았는데, 그곳에 비스듬이 누운 소나무가 있습니다.

그곳에 올라가서 한참을 있다가 다른 얘들이 올라오면 막 흔들어 댑니다. 그러면 버티기 하다가 못 버티면 뛰어 내립니다. 아래는 논이라서 별로 위험하지 않습니다.

흔들어 주실 때 우린 비로소 십자가와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우리 자신이 십자가 알고 복음 안다고 해도 그 앎이 주님의 피를 대체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피는 우리가 소유하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는 그 피에 날마다 장악당하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