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4-08 21:12
골로새서 강해 62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85  
골로새서 강해 62 

골로새서 4:10

함께 갇힌 자

관리자 18-04-08 21:12
답변  
함께 갇힌 자
골로새서 4장10절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과 만나고 싶습니다. 돈 많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돈 없는 사람입니까?
거지를 만나고 싶습니까 아니면 부자를 만나고 싶습니까?

사람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겁니다.

창세기39장을 보게 되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모함을 당해 왕의 죄수들이 갇히는 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래서 40장을 보게 되면 먼저 떡 맡은 자의 꿈과 술 맡은 자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요셉은 꿈 해몽가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내용을 해석해 줄 뿐입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요셉이 생사에 대한 꿈을 해석했으니 우리에게도 이런 꿈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떡 맡은 관원장은 죽고, 술맡은 관원장이 살 것이라는 꿈의 해석이 이들에게 언약 안으로 들어오게 하지 못했습니다. 떡 맡은 자는 해몽대로 죽었고, 술 맡은 관원장은 살았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들이 꿈을 꾸지 않았다며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시 동일한 결과가 나오겠지요.
그러면 왜 꿈을 해석해 줍니까?
누구 기분 좋아라고 해석해 줍니까?

아니지요. 물론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의 해석이 길함을 듣고 떡 굽는 관원장도 자신의 꿈이 길하기를 기대하고 그 해석을 묻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길하고 흉해 보았자 그들의 삶은 지옥의 삶이었을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점 보러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점 치는 자들이 중이 아니라 목사나 권사가 점을 봐 줍니다. 물론 요셉과 같은 지혜를 자신이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창세기 40장을 보게 되면 그 꿈 해석을 받은 자들은 여전히 저주 속에 살아가는 자들일 뿐입니다. 그러면 왜 요셉에게 그들의 꿈을 해석하게 했습니까?

우린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요셉에게 이로운 일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그렇지요. 요셉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술 맡은 관원장에게 전직이 회복되면 바로 왕에게 자신의 사정을 고해서 이 감옥에서 구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요셉도 여전히 모릅니다. 자신이 왜 애굽에 팔려 와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된지를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사람을 찾고 싶었겠습니까?

문제는 그 술 맡은 관원이 관직이 회복 되자 요셉을 잊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에게 꿈꾸게 하시고 뿐만 아니라 꿈을 해석하게 하신 이유는 개인 일신상의 평안과 축복을 얻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자기 곡식단만 일어나고 형들의 단은 자신의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라는 꿈을 이야기 할 때 형들이 그 해석을 합니다.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이러한 해석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해석입니다. 요셉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또 하나의 꿈은 열 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고 해와 달조차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이제는 야곱이 요셉을 꾸짖습니다. 야곱의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이 땅을 사는 사람이라면 성령 받지 않고도 다 할 수 있는 해석입니다.

요셉은 이 꿈을 잊어버렸을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에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고 합니다.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기회를 잡았는가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잊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창세기 39,40장을 보면서 이미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애굽의 총리대신 된 요셉에게 가 있지요.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실상 믿음이 있는 자는 요셉이 이러한 삶이 총리대신의 삶임을 알겠지요.

무슨 이야기인고 하면 역사를 거꾸로 돌려보자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요셉의 주 된 자리가 먼저 있고 그 자리를 말하기 위해 요셉이 태어 나고 꿈을 꾸고 형들에게 미움받고 팔리고 감옥에 갇히고 한 것입니다.

이 안목이 바로 세례요한의 안목이며 주님의 안목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요셉이 언제쯤 그 꿈이 이루어지는 가에 관심을 둡니다.

그런데 한번 보세요. 요셉이 감옥에 갇혔을 때 사람들이 그를 어떤 사람으로 봤습니까?
주로 봤습니까? 그냥 죄수일 뿐입니다. 좀 유능한 죄수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볼 때 어떤 안목으로 보겠습니까? 영화롭게 된 사도 바울로 보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함께 갇힌 아리스도고’ 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20:3절을 보면 데살로니가 사람이라고 되어 있고, 사도행전 19:29절에선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서 가이오와 함께 잡혀 죽을 뻔 하였습니다.

사도바울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고 문안하는 아리스다고도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사람과 친구로 두고 싶습니까?

요셉처럼 애굽 총리 대신 되는 사람이랑 친구하고 싶지 어느 누가 죄수인 요셉과 친구 하고 싶겠습니까? 물론 이용가치가 있을 때에야 이용하겠지요.

누가복음5:1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온 몸에 문둥병 걸린 사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그러자 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습니다.

꼭 오늘날 교회 같습니다. 인간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예수님이라고 하면 소문이 금방 퍼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몰려 갑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듣고 싶은 말씀도 듣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라 죽으심으로 그 죄를 친히 담당하시는 주님이심을 증거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에 속한 자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 눈에는 이제야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겁니다.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설교 말씀도 자신들 마음에 속 듭니다. 뿐만 아니라 능력도 많습니다. 그러니 그런 예수를 자신들의 임금으로 모신다면 자신들의 평생 삶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다른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이 이 땅에서 아벨처럼 날마다 허무해져야 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교회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좋은 말씀, 즉 자신을 더욱더 견고하게 세워주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지 자신이 폭파당하고, 해체 당하는 말씀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져 갑니까?
제자들이 왜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갑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들을 해체시키는 분임을 알아 차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는 자신들의 꿈을 담고 있는 자기 몸마저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빨리 발을 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합니까?
말씀을 전하실 때 산상설교처럼만 말씀을 전하시고 병만 고쳐주셨다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병을 고치시더라도 꼭 안식일 날 병을 고칩니다. 병만 고치면 좋은데 유대인들이 보기에 안식일날 일을 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이해가 너무 다릅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을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신학교 다닐 때 이런 것 배웁니다.
성경을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면 계시라는 것은 그 계시를 받는 대상이 있을 것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성경 말씀을 자신들을 위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는 성경 말씀을 자신들을 위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주의 교회가 되었던 아니든 모든 교회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성경을 주신 이유는 성경을 읽고 구원 받으라고 주셨지 멸망 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한 자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자신들만이 선민으로서 자신들만 구원시키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유대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경은 자신에 대해 증거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들이 그것을 알아들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곧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기록했고 예수님을 위해 주어졌다는 말씀입니다.

계시자체가 예수님을 위한 계시이지 인간을 위한 계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성경말씀을 다 이루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시지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고 믿으면 되는데 안 믿어요.
아니 못 믿습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절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절대로 영으로 뛰어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읽는 이유는 오로지 자기 구원 받는 목적 외엔 없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꿈을 주시고, 꿈을 해석하게 하신 이유는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 요셉을 사용하신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45: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요셉은 꿈을 꾸게 되었고, 애굽에 팔렸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고, 꿈을 해석하게 되고, 총리대신이 되었던 겁니다. 이 사실을 요셉은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시편105:17,18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나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은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감옥에 갇힌 바울과 아리스다고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왜 감옥에 갇혔습니까?
요셉처럼 꿈을 꾸었고 그 꿈을 발설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피를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의 현장이 드러나는 자리가 바울과 아리스다고가 감옥에 갇히는 자리입니다.

이들은 지금 이렇게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 천국에 들어갈 조건이 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목사는 그리스도의 삶이 뭔지 몰라요. 그 목사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삶은 행위입니다. 아리스다고가 무엇 때문에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목사 주장대로라면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많아야 하지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야 말로 사람들에겐 걸림돌 역할밖에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 목사는 자신이 상상하는 예수를 만들어 놓고 성경구절을 조금씩 끄집어내어 예수우상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성도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은 자는 오로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의 심판 주되심을 증거 합니다. 그래서 그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온 세상을 부정하는 말 외엔 나오지 않습니다. 그 어디에도 세상을 긍정하는 말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아리스다고의 문안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리스다고의 문안이 반가울까요?

교인 한 명뿐인 복음을 아는 목사님 성도님이 반갑습니까? 성도 한명도 없는 목사님이 반갑습니까? 돈 없는 성도가 반갑습니까? 별로 안 반갑습니다.
우리가 반갑게 인사 나눌 만한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나를 긍정해 주는 사람의 안부를 받고 싶지 혹 내가 도와야 되지 않을까? 내가 연보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사람의 안부는 별로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안부가 안부가 아닌 겁니다.

물론 십자가 피만 자랑하는 자들에겐 아리스다고의 문안이 그렇게 기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자기 구원, 자기 축복, 자기 사랑에 목말라 있는 자들에겐 이 본문을 지우고 싶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지금도 십자가는 늘 현재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