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3-27 23:09
골로새서 강해 60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55  
골로새서 강해 60

두기고

골로새서 4:7-8

관리자 18-03-27 23:09
답변  
두기고
골로새서 4장7-8
오늘 본문에 사람 이름이 등장합니다. 두기고 라는 사람과 오네시모입니다.
두기고는 사도행전 20:4절에 나옵니다.
두기고를 아시아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 때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헬라 즉 오늘날 아테네, 고린도 지역을 말합니다. 여기서 아시아로 가려 할 때 함께 동행할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라고 소개합니다.
에베소서 6:21절에서도 이렇게 두기고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랑을 받는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인군인 두기고.” 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사람 이름의 등장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그 이유는 두기고와 나를 동일시 하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행세하는 인간들의 특징은 흉내내기 전문입니다. 흉내내기 전문이라고 했을 때 여러분들은 무엇을 보고 흉내낸다고 생각 하시겠지만 인간들은 무엇을 보고 흉내내는 정도가 아니라 보지 않고도 흉내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인간들을 보세요. 그들이 하나님을 봤습니까? 이스라엘이야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그 주변 국들은 어떻습니까? 신들이 다 있습니다.

민족마다 개인마다, 국가마다 신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신을 찾고 신을 만들어 내는가? 그 이유에 대해 똑똑한 사람들이 답변을 내어 놓겠지요. 두려움 때문이다. 아니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여러분 생각에는 왜 신을 찾습니까? 소망 때문이지요. 그러면 소망이 왜 생깁니까? 그 소망이 왜 생기는지는 또 욕망 때문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욕망은 왜 생길까요?

이것의 근원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을 보게 되면 그 근원이 어디있는지 알 수 있지요. 결국 인간들이 신을 찾는 이유는 유토피아를 꿈꾸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곳은 언제나 저 멀리 있지요.
그 유토피아, 자신을 천국에 데려다 줄 자가 신이라는 겁니다.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가 왜 우상 숭배를 합니까? 현실에 대한 불만입니다. 그 현실을 솔로몬 왕국으로 되돌려 줄 신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두기고 이야기 하다가 왜 이렇게 우상 이야기로 빠집니까 하겠지만 두기고가 우상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두기고가 우상이 됩니까라고 여러분들은 따지겠지요. 그 이유는 설교자들이 두기고를 두고 어떻게 설교합니까? 본 받자고 하지 본 받지 말자고 하는 설교자가 있습니까?

성도의 완벽한 모델이 두기고잖아요. 그러면 오늘 본문을 보면서 뭐라고 설교하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도 두기고처럼 사랑을 받는 형제, 신실한 일군,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새겨봅시다. 만일 성도들이 두기고처럼 되면 성도들이 목사가 된다는 말이 되잖아요. 그런데 목사들이 그것을 목적으로 이렇게 설교하겠습니까? 아니지요. 그들의 노리는 바는 자기 종 삼기 위한 축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두기고가 누구의 사랑을 받는 자입니까? 사도 바울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인데, 이것을 보증할 근거가 오늘날에 있느냐는 겁니다.

결국 목사의 사랑의 받고, 목사가 보기에 진실하고, 목사가 보기에 함께 된 종으로 여길 때 이 말씀은 교회에서 효력이 있는 말씀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 본문을 설교하는 목사들은 신이 났어요. 어차피 믿음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십자가의 사랑을 알아가는 말씀으로 보지 않고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씀을 통해 목사가 신이 되고 교인들은 그 신을 섬기는 신들이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말하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필요 없잖아요 할 겁니다. 왜 필요없습니까?
벌써 오늘 본문이 필요한 이유를 말씀드렸잖아요.

말씀을 갈라내는 일을 합니다. 심판 주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 하셨기 때문에 그 결과물들이 드러나는 현장이 교회 안입니다.

그러면 두기고와 같이 사랑을 받고 신실하고 함께 된 종은 없습니까?
여러분 이 질문을 하기에 앞서 본인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신실하고 주님의 종으로 사는지를 먼저 물어 봐야 합니다.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 열심히 하고,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 열심히 하고, 십일조 열심히 하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오늘날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주님 사랑은 이렇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지요. 목사가 교회부임해서 설교 열심히 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심방 열심히 하고, 사람 열심히 끌어 모으면 주님 사랑하는 사람이요 신실한 사람,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어이없지 않습니까? 두기고에 대한 평가는 주님의 평가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또 똑똑한 사람들이 두기고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 데마처럼 될지 어떻게 압니까라고 따질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제가 말씀 전할 때 마다 여러분 말씀드렸습니다. 자기가 주님도 아니면서 주님 행세하는 모습이 그런 식으로 따지는 겁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안개,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과 같은 인생임을 모르는 자입니다. 주님이 하루하루 살게 하시고 주님의 일하심을 증거하는 자들이 들풀이요 안개인데 저들은 증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판단자로 나서고 있습니다.

본래 두기고가 어떤 사람입니까? 마귀의 아들이지요. 그렇다면 두기고는 누구의 사랑을 받는 자였을까요? 마귀의 사랑을 받는 자, 즉 사람의 사랑을 받는 자 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들에게 아주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꼭 우리 같아요.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 사람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습니까? 물건을 사주는 사람, 월급을 주는 사장님, 그리고 그들에게 우린 진실되기 때문에 그들의 신뢰를 받으며 그들의 주머니로부터 돈을 받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사람의 사랑을 받는 사람을 좋게 하는 자가 두기고 였습니다.
사람을 좋게 하려면 세례요한처럼 싫은 소리 하면 안됩니다.

분봉 왕 헤롯이 자신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것을 두고 세례요한이 대 놓고 옳지 않다고 말하면 목을 내 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4장에 나오는 이 사건을 두고 관람자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면서 세례요한은 왜 쓸데 없이 그런 말을 해서 목이 날아갔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례요한은 선지자입니다. 엘리야로 온 선지자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이세벨에게 목이 날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목이 잘렸습니다. 선지자로 죽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아벨에서 시작하여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은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3:35).

여기에서 우린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세례요한의 죽음은 언급하지 않을까요?
마태복음 11:11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구약 선지자들의 어떠한 죽음보다 의미 있는 죽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린 세례요한에 대해 좀더 살펴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3:1-3절입니다.
“그 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게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세례요한이 하는 일은 주의 길을 예비하고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일입니다.

요즘 제가 사는 동네가 엄청 요란합니다. 왜냐하면 곧 황제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도로 포장 공사를 새롭게 하고, 중앙분리대도 새롭게 단장하고, 좀 낡아 보이는 아파트는 색칠도 새롭게 하고, 뭐 이런 난리 난리가 없습니다.

이사야 40:3-4절을 보겠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 말씀대로라면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인간들의 마음을 낮아지게 해야 하는 역할, 예수님을 믿을 준비를 다 갖추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5절이 문제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모든 육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모습이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렇다면 3,4절에 대한 이해도 완전 다르게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입니다. 그러나 그를 찌른 자들도 다 보았지만 그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는 작업은 예수님이 죽으시기에 가장 적합한 상황을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 당시 분봉 왕이 헤롯입니다. 다니엘서를 보게 되면 분봉왕이 우연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이 분봉왕 없이 다스리면 될 곳을 분봉 왕을 세워 그곳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헤롯 대왕은 B.C. 4년에 죽고 세 아들에게 물려 주는데 유대와 사마리아는 헤롯 아켈라오(B.C. 4-A.D. 6)에게 물려 주었지만 그의 폭적으로 해임되고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활동하든 시기는 본디오 빌라도가 직접 다스렸습니다.
또 다른 한곳은 헤롯 빌립인데 그는 요단 북동편을 A.D.33년까지, 그리고 갈릴리와 뵈레아 지역을 세례요한의 목을 벤 헤롯 안티파스가 분봉 왕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3:6,7절을 보면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줄 알고 헤롯에게 보냈습니다. 그때 마침 헤롯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롯이 이적 행함을 기대하면서 여러 말로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도 대답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군병들과 함께 업신 여기며 희롱하며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재미 있는 것은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는 서로 친구가 되니라고 합니다.

짐승은 항상 서로 흩어져 자기 이익만 추구하다가 예수님의 등장으로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세례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역할을 한 겁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인 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는 그 죽임을 세례요한이 당한 겁니다. 갈릴리 지역이 북 이스라엘 지역이었지요.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와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외침을 외쳤기 때문에 목이 잘린 겁니다. 그 잘림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이 심판받을 발판을 확실히 마련한 겁니다.

두기고와 세례요한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들의 특징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증인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말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진실한 일군이라는 것은 사람들 보기에 진실한 일군과는 정 반대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 가운데 두기고 같은 사람이 있으면 꼴 보기 싫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자랑하는 것이 십자가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인정해 주고, 사람에게 진실하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얼마든지 환영할 만한데 사람이 듣기 좋은 소리를 한 적이 없습니다.

나오는 소리마다 못 알아 듣는 기분 나쁜 소리만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죄라고 외칩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두기고를 좋아하겠습니까?

함께 된 종이라는 말은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종은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종은 일반적인 종과 다릅니다. 일반적인 종은 주인의 말끼를 알아 듣고 자기가 주체적으로 행동을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종은 주체가 없어요. 누가 친히 일을 하시는고 하면 주님이 친히 일을 해요. 그래서 그 종은 자신이 주를 위해 한 일은 없고 죄만 지었다고 해요.
이들은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종과는 사뭇다르지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말의 의미도 뒤틀어지지요. 흉내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을 골로새 교회에 특별히 보낸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일행이 처한 상황을 모른다면 이 말씀은 참으로 은혜되는 말씀이라 생각되어질 겁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바울일행의 사정이 어떤 사정입니까?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사정을 말하고자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그리스도의 비밀 속에 자신들이 들어 있다는 사정을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복음 전하다가 망했다고 하면 위로가 될까요?
복음 전했는데 사람이 다 떨어져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라고 듣는다면 위로가 될까요?

정말 사도바울이나 골로새 성도들이나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고 납득 안되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그 승리 속에 살려지고 있음이 그들의 형편과 상관없이 위로가 된다는 사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돈이 많아서 즐거운 것도 아니고, 자유를 가져서 즐거운 것도 아닙니다. 자식이 공부 잘해서 위로되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돈 많이 벌어주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 때문에 미움받고 감옥에 갇힌 것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이 위로가 됩니까? 스데반의 죽음이 위로가 됩니까?

위로가 되는 이유는 골로새서 3:12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 늘 매장 당하는 자에게서 나오는 기쁨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들이 두기고와 같은 자들입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를 사랑을 받는 자, 진실한 일군, 함께 종 된 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겁니다. 헌금 잘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 아닙니다. 내가 신뢰할 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을 잘 돕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 아닙니다.

어떠한 형편에 있든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겁니다. 혹 우리에게 이런 형제가 있다면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