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2-27 09:57
골로새서 강해 56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67  
골로새서 강해 56

골로새서 3장20-21절
부모와 자녀


관리자 18-02-27 14:44
답변  
부모에게 순종하고 자녀를 격노케 말라.
골로새서 3장20-21절
인간의 몸은 자동적으로 자신의 몸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혈육이라고 하면 끔찍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부모에게나 자식들에게는 그야말로 너무나 끔찍한 말씀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오늘 본문 말씀이 어떻게 끔찍한 말씀인가라고 반문하시겠지요.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먼저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라는 부분을 보게 되면 마치 부모를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해석할 여지를 줍니다. 그런데 헬라어 본문을 보게 되면 ‘이는 주께 기쁨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유교적 입장에서 헬라어를 번역하면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효 사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녀들이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부모의 기쁨은 빠져야 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문제는 본문 말씀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엔 어떤 것은 빼고, 어떤 것은 넣고 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은 항상 선택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부모님이 계셨지요?
모든 일에 순종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그러면 지옥입니다.

살아계실 때 잘할 걸 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사는 반드시 지내려고 하지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해 봐야 모두 순종하는 하는 삶이었어냐는 말입니다. 도대체 부모님께 어느 정도 순종할 겁니까?

주님의 말씀은 우리더러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말씀 자체를 자꾸 우리보고 하시는 명령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지킬 수도 없는데 자꾸 지켜야 한다고 우기는 그 심보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모든 일에 순종하라고 하시잖아요. 지켜보세요. 어느 누가 지킬 수 있습니까?

21절을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 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실 보모가 자녀를 방치하는 것이 맞아요.
왜 그런고 하면 아기때부터 부모가 다 통제하잖아요. 고추장 먹으려고 하면 맵다고 못 먹게 하면 아기가 가만 히 있나요? 짜증 나고 울고 불고 하잖아요.

휴대폰 하는 얘들 휴대폰 뺏어 보세요. 자살합니다.
자녀를 늘 격노케 하는 자들이 부모들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늘 낙심하지요.

인간들은 자꾸 말씀자체를 사람의 교훈으로 생각하면서 우리 인간들이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버리면 항상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말씀 위배자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저주요 지옥입니다.

그러면 목사나 교인들이 왜 자꾸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 자신들이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이해할까요?

그 이유는 자신들의 소속이 악마의 소속이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 먹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악마의 놀이 게가 되었습니다. 그러 하기에 인간은 악마가 바라는 인간의 공로를 앞장세우게 됩니다. 그 공로는 반드시 행위에서 나옵니다.

그 행위는 반드시 법이 있어야 나오는 행위가 되고 그  법은 선악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왜 법을 주시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그 법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바로 악마의 생각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법을 주신 이유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 주셨습니다.

성령받은 자들에게 법은 십자가로 우리들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음을 확인하는 법입니다.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노력해서 천국에 들어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한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는 분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는 분도 오직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의 깊이를 증거하라고 우리에게 법을 주셨는데 인간들은 선악과 따먹은 행세를 합니다.

창세기 9장을 보면 노아와 그의 세 아들에 관한 사건이 나옵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에 벌거벗고 누웠습니다.

이 모습을 가나안의 아비 함이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두 형제 셈과 야벳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뒷걸음쳐 들어가 아비의 하체를 덮었고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오늘 본문과 연결해 봅시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위반한 자는 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비 노아가 한 행동은 어떻습니까?
과연 함을 화나게 하지 않았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노아 방주를 통해 구원받았다면 구원받은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버지의 도리가 아닙니까? 그런데 노아가 술취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벌거벗고 누웠습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고 이런 행동을 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용서 못할 겁니다. 그러니 함의 행위가 우리가 보이엔 더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관찰자가 되면 셈과 야벳에게 손을 들겠지만 그 현장에 있는 참가자라면 우린 함편에 들지 절대 셈과 야벳편에 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아버지가 매일 술만 마시고 들어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아버지 말에 복종하겠습니까? 죽이고 싶어서 죽인 자녀들도 있잖아요.

제가 너무 나가는 것 같습니까? 제가 너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함에게 노아의 행동의 그런 겁니다.
성경이 안 맞아요. 노아는 아들 함을 낙담케 했습니다. 아니 저주를 퍼붓습니다. 무슨 이런 아비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입니다. 저주를 퍼붓을 줄 아는 부모가 자녀를 화나게 하고 낙담케 하지 않는 아비입니다.

함과 셈과 야벳 그리고 그 아버지 노와의 행위를 통해 이 말씀이 딱 들어 맞아야 하는데 둘로 나누어져 버립니다. 골로새서 말씀이 각자 이루어지고 있지요.

말씀은 자꾸 우리 물을 움켜잡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듯이 빠져 나가 어느 순간 십자가만 밝히 보이도록 합니다.

사무엘 상2,3장을 보겠습니다.
여기에 엘리라는 제사장과 그 아들들이 나옵니다.
엘리는 그 아들들을 절대로 화나게 하지 않습니다.
2:12-17절 을 봅시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여러분들이 만일 제사장 엘리라면 이런 아들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만히 두겠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이 본문을 읽은 모든 사람들은 엘리 제사장을 문제 삼을 겁니다.

3:13절을 보면 “내가 그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임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고 합니다.

물론 훈계는 했습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저주를 자청하는 원천을 제거해야 하는데 자기 아들들을 누가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 엘리는 아들을 절대로 화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들은 아버지 말을 안 듣습니다.

여기에 대한 총괄적이 여호와 하나님의 평가는 나를 멸시한다는 겁니다.

제가 지난주 부부관계를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를 지키면 하나는 어기게 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을 화나게 합니까 안 나게 합니까?
자본주의 시대에 돈의 노예가 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는 시대를 사는 아이에게 성경 읽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주일날 말씀 듣게 하는 것은 그야 말로 자녀의 앞길을 막는 겁니다.

더더욱 십자가 복음은 자녀를 망치는 복음이지요. 긍정적 사고를 심어 주어도 될까 말까한 세상에 맨날 헛되다고 설교하는 것을 듣게 하겠습니까?

어느 교회에 젊은 사람들은 이 복음이 좋다고 왔다가 목사님이 매주 십자가와 죄만 외치니 자녀 교육이 안된다고 해서 떠나가 버렸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우리를 대변합니다. 자식이 좋다면 다 좋아요.

어느 부모가 자식이 복음 아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이라 하겠습니까?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이지요.
좋은 아내 좋은 남편 만난고, 아파트 사고, 더 큰 곳으로 이사가는 것이 기쁨이지 그런 일을 두고 저 어리석은 놈, 안개를 잡아서 어디에 쓸려고 하는 부모 있습니까?

신앙이야 시간 날 때, 할 일 없을 때 가지는 것 아닙니까?

돈 되는 일을 엘리 제사장 아들들이 하잖아요. 삶은 고기 맛보도 숯불고기 맛이 더 좋잖아요. 우리 자녀가 부자되는 것이 십자가 복음보다 더 소중하잖아요.

어느 부모가 성경 모른다고 고액 과외시킵니까? 만일 천국가고 구원얻는 것이 성경 아는 지식으로 간다면 틀림없이 고액과외 시킬 겁니다. 그런 집단이 있잖아요. 참 가짢지도 않아요. 새하늘과 새땅이 자기 기억력으로 들어간다니 말입니다. 아마 성경 많이 알면 천국갈 수 있다고 하면 당장 고액과외 시킬 겁니다.

성경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해 놓고 성경말씀을 집어 던져 버리지요.

그러니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녀와 아비들은 그림자입니다.

세상엔 자녀가 먼저 있고 아비가 나중에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들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순종과 격노케 하지 않음이 여기에서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납득이 안되지요.
납득 안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순종과 격노케 하지 않음이 등장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15).”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부르짖느냐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처한 상황이 언제나 부르짖는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아들을 즉 양자들은 철저하게 맏아들 되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우리가 볼 땐 아들 만들었으면 부르짖는 상황으로 가게 하면 안된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은 아들을 화나게 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환난과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이 이들 앞에 등장하게 하는 일은 아들을 화나게 하는 일로 여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이야 말로 낙심하지 않게 하는 십자가의 사랑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증거하는 상황을 주님께서 연출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 즉 양자로 하여금 모든 일에 아버지께 복종하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 일은 바로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살만한 세상 만드는 것으로 보시면 결국 이 땅이 멸망당할 때 함께 멸망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말씀되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우린 십자가의 피로 사는 자들임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린 부모에게 십자가의 피만 증거하며 자녀들에게 십자가의 피만 유일을 소망임을 담대해 증거하게 됩니다.

사사기 17장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엄마가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고 그 훔쳐간 자에게 저주를 퍼부었는데 그 저주를 아들 미가가 듣고  자신이 그것을 취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엄마가 저주를 축복으로 바꿉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 미가를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여호와께 이 은을 드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호와께 드렸는데 그 드린 자리가 자기 집안 구석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이 중심이 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겐 말씀은 집안 축복이 중심입니다. 집안 축복을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이용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모든 일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은 싸우는 이름입니다. 무엇과 싸웁니까? 공중권세 잡은 자와 싸워서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하셨음을 부모와 자녀관계속에서도 드러내시겠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린 사사기18장에 나오는 미가 집안을 보면서 우리의 본성이 드러나야 합니다.
부모에 대한 순종과 자녀를 화나게 하지 않을 방법은 미가와 그 엄마처럼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과 그렇게 잘 살고 있잖아요.
자녀에게 십자가 모른다고 저주합니까?
저주 하지 않잖아요.

십자가만 자랑하는 부모,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녀가 바로 주 예수 이름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