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2-18 22:14
골로새서 강해 55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66  
https://youtu.be/ziR6-WWE3cI


골로새서 강해 55

골로새서 3장18-19절

아내의 복종과 남편의 사랑


관리자 18-02-18 22:14
답변  
남편의 사랑과 아내의 복종 

골로새서 3장18-19절
사람들은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세상이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존재한다고 합니다.

창세기를 보게 되면 맨 마지막에 만들어진 피조물이 사람입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말하면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을 둘로 쪼개버립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사람들이 기분 나빠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은 남자와 여자인데 여자는 반드시 남자 속의 여자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는 한 몸입니다.

이 관계는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엔 항상 한 몸이 아니라 두 몸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면 사람들의 결혼을 보게 되면 결혼이 누구 중심으로 이루어집니까? 부부 중심입니다. 물론 부부 중심에서 자녀가 등장합니다. 물론 이 관계는 사회조직망 속에 위치하게 됩니다. 그것을 종과 주인과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18절에서 4장 1절을 보게 되면 이 모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남편과 아내, 아내와 남편관계를 말씀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우린 아내들이 남편에게, 남편들이 아내에게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하시는 말씀이라 여깁니다.
실제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라고 하시고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주석들을 보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함으로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는 기초가 될 수 있고  남편들은 그 당시 문화적 상황에서 여자들의 위치가 남편의 폭력에 노출되기 쉬운 상태였기에 바울의 가르침은 신선한 가르침이다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복종하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자체를 이런 방식 외에 설명할 길이 없잖아요.
아니면 복종하라는 유교적 의미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아내의 지위는 역시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에 있기에 남편에게 아내를 괴롭히지 말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현대에서 해석하면 여자들이 미쳤다고 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느냐고 할 것이고, 남편들은 내가 오히려 괴롭힘을 당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매 맞는 남편이 많아지는 시대이니 말입니다.

명절만 되면 시집 문제를 다루잖아요. 이럴 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이용할 수 있겠지요.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세요. 그러면 아내는 여보 남편은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마세요.

어떤 시대에서도 오늘 본문 말씀은 안 맞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나요?
복종하라는 단어 속엔 괴로움을 담고 있습니다.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속엔 복종하면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좀 깊이 푹 파 보아야 되는데 항상 겉면만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도 사실은 육적 안목입니다. 육적 안목이라는 것은 지옥가는 안목이라는 말입니다.

매우 과학적인 사람이 오늘 본문을 분석해 낸다면 방금 제가 말씀드린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교회가 말씀을 얼마나 수준 낮게 보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기껏해야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잖아요. 아니면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말씀이라는 것이 한 쪽만 주어지만 그나마 지킬 만 합니다. 그런데 모순된 관계 둘을 집어 넣어 놓고 지키라고 명령을 하시면 어느 인간도 이 말씀을 지킬 남편 아내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반문을 할 겁니다. 그러면 왜 이 말씀을 주셨습니까?
그러면 우리에게 해당사항도 없는 말씀을 왜 주셨습니까?

이런 질문이 나와 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이 진짜 선악과 따먹은 자들의 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자들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가지입니다. 자기 구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자기 축복입니다.

그저께 설날 전에 예빈이 외이모할머니께서 자신 집안에 일어난 이야기를 했습니다.
손자될 얘가 뱃속에서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을 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하나님께 따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하나님이 책임지라고 기도 했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공감이 되잖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찌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리라(전6:14-7).”

이 말씀에 아멘할 인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축복은 천년의 갑절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천년의 갑절을 사는 목적이 뭔고 하면 식욕 채우는 겁니다.
아무도 여기에 동의 안할 겁니다. 기껏 인간들이 사는 목적이 식욕채우는 것이냐고 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골로새서 3:5절에서는 탐심이라고 하지요. 식욕이라는 것이 바탕에 깔려 그 위에 눈에 쌓이듯이 다른 탐욕들이 소복이 쌓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쌓인 눈을 치워보면 그 바땅에는 식욕이 바탕색으로 깔려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자기 구원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살아야 돼. 우리 가정에 그런 어려움이 있으며 안 돼. 우리 가정만은 축복해 주셔야 해.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정의 중심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 중심으로 보게 되니 오늘 본문은 주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이상적인 가정 세우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

주 예수 이름을 위한 남편과 아내가 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새롭게 채굴되어야 할까요?
죄입니다.
죄가 채굴되어야 하는데 죄가 채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말씀을 통해서 채굴하려고 합니다.

창세기 12:10절을 보면 아브람이 축복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 애굽에 거하기 위해 그리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아내 사래입니다.  사래가 너무 예쁩니다. 그래서 아브람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아내를 자신의 누이라 하라고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은 사래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래의 대답이 없어요. 복종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린 질문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않았습니까? 딱 정반대입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고 괴롭게 했습니다. 누가? 남편 아브람이 말입니다.

이와 달리 아내 사래는 남편에게 복종했습니다.

말씀이 안 맞아요. 왜 그런고 하면 우린 성경 말씀을 주 예수의 이름에 적용시키려고 하지 않고 자꾸 우리 이름에 적용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전서 7:3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그래서 결혼해도 되고 안해도 되고, 남편 있어도 되고 남편 없어도 되고, 이혼해도 되고 이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쓴 골로새서와 사도바울인 쓴 고린도 전서가 왜 이렇게 다릅니까? 다르지 않아요.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주 예수의 이름을 빼 버렸기 때문에 다르게 보이는 겁니다.

주 예수의 이름이 들어가게 되면 그 이름이 하신 일이 드러납니다.
그 이름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분이 심판 주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 심판 주 되신 분이 만드신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지나가는 형적으로 무엇을 증거해야 하는고 하면 진짜 남편 진짜 아내가 누군지를 증거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래 맞아. 진짜 남편 진짜 아내를 증거하기 위해 우린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해.
남편에게 복종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아야 돼 라고 하겠지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누구의 생각인고 하면 십자가를 제거하려는 악마의 생각입니다. 악마는 부부관계에서, 남편과 아내 관계에서 십자가를 빼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의 이름이 만든 세상, 곧 아들의 나라는 십자가의 피 공로만을 증거하도록 만들어진 세상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공로를 증거하기 위해 남편 역할 아내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십자가의 공로를 증거하는 역할을 하게 될까요?
죄가 채굴되어야겠지요.
죄가 나와야 십자가의 피를 증거할 수 있잖아요.

그 죄를 채굴하는 자리가 처음에는 남편과 아내 자리입니다. 사람들은 이 죄를 채굴당하기 싫어서 결혼하지 않으려고 해요.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이잖아요. 내 몸 하나만 편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세상이잖아요. 결혼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행복하지 않을까 하여서 결혼하지 않잖아요.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이니 결혼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결혼해야 죄가 채굴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남편과 아내관계 속에서 나오는 죄가 채굴되지 않아요. 물론 사도바울처럼 홀로 사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이 죄도 채굴되겠지요. 지금처럼.

그러면 어떻게 죄가 채굴됩니까?
바로 말씀입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시지요. 어느 인간도 남편에게 복종할 인간 없습니다.
여기에 많은 아내 분들이 계신데 여러분들 남편에게 복종합니까? 이렇게 물으면 우린 당장 우리 남편이 예수님을 몰라요. 그래서 난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알면 복종합니까? 복종할 인간 없어요.

인간은 한 몸을 몰라요. 자기 몸 밖에 몰라요.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된다는 창세기말씀은 선악과 따먹은 이후에는 자기 몸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바뀌었어요.

아내의 복종은 반드시 생명 즉 영생과 관련 있습니다. 복종에서 생명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복종은 복종이 아닙니다.

남편에게 물어봅시다. 아내를 사랑합니까? 아내를 괴롭게 하지 않습니까?
사랑한다고 백날 해도 아내가 사랑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아내 되시는 분들 사랑 받고 있나요. 가끔이 아니라 성경말씀은 항상 온전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 사랑은 생명과 영생을 줄 수 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게 되려면 재벌 2세나 3세가 되어야 되지 않을까요? 아내가 돈 벌러 나가는 것은 아내를 괴롭게 하는 일입니다. 설거지는 아닙니다.
평소에 설거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가 몸이 피곤하거나 경제적 어려움이나 뭔가 자녀 때문에 다툼이 있으면 설거지 하다 그릇 다 깨고 싶습니다.

벌서 아내를 괴롭게 해 버렸습니다. 아내를 괴롭게 하지 않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않는 것도 영생을 가져 올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나오는 모든 일 중 하나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속에서 나오는 일인데 이 일 속에서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모든 일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합니까?

마태복음 25:1-13절을 보겠습니다.
열 처녀 비유를 하셨습니다. 여기에 신랑과 신부들이 나오지요. 넉넉히 기름 준비한 신부들은 신랑과 혼인 잔치에 들어갔지만 기름이 모자라 기름 구하러 간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신부를 누가 만드시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신부는 신랑이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기름준비 넉넉히 하여 깨어 있어서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다 신랑을 맞이하자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태복음8:1절 이하를 보면 누가 구원얻습니까?

한 문둥병자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그 문둥병자가 어떻게 구원 얻었습니까? 구원얻기 위해 문둥병에 걸렸습니까? 아니지요. 주님께서 문둥병 걸리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 것은 영원한 대제사장되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그렇게 걸리게 된 겁니다.

그 당시 문둥병 걸린 자들이 한둘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주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소원대로 계시를 주셔서 한 문둥병자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기름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말입니까? 그러면 문둥병은 누가 들게 했습니까? 누가 그 사람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원천을 모르는 인간들은 원천엔 관심이 없고 드러난 현상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 이유는 자기 구원 때문입니다.

아들 되신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주가 되셔서 자신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들에게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들이 신랑 되신 예수님이 만드신 신부들입니다. 그래서 신랑되신 예수님은 신부를 사랑하셨습니다. 결코 신부를 괴롭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저는 지금 괴로운데요라고 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괴로움의 원천이 뭔지 몰라서 그래요. 괴로움은 마귀의 종으로 산다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부자로서 매일 잔치하며 지내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사랑 받지 못한 자의 샘플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사랑받는 자의 표본이요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자의 본 모습입니다.

그러면 또 질문할 겁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잖아요.
우린 성도로서 아내인데 복종하지 않잖아요. 그러니 복종하는 겁니다.

주님은 자신이 만드신 아내를 항상 십자가만 증거하도록 복종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린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는 죄인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말이 참 어렵지요. 쉽게 말하면 주께서 막 살게 하셔서 우리가운데 죄만 꺼집어내심으로 제대로된 아내의 기능, 즉 남편에게 복종하는 기능을 발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은 누가 이루시는고 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 다 이루심을 증거하라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이 세상에서 여전히 갖게 하시면서 살게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이것이 매개물이 되어 십자가의 피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 우리 오목사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이 매개물이 없으면 십자가의 피를 증거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우린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면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해요. 왜 그래요. 이 세상을 사는 자체가 번거롭고 말씀과 괴리가 있기 때문이잖아요. 주님은 그렇게 사는 것이야 말로 모든 일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삶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주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시기 위해 우리의 삶을 그야 말로 막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막 살지 않으려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이렇게 말씀드리면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으려고 해요.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괴롭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죄를 지어야 피를 증거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짓는 죄는 죄로 안 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죄를 짓는 그것이 의가 되잖아요. 논리를 따라 오셨습니까? 그냥 막 사시면 주님이 열 추적 미사일처럼 추적해 오셔서 우리 죄를 발굴해 내셔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죄들을 주님께서 꺼집어 내셔서 십자가의 피만 자랑하도록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