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2-04 20:14
골로새서 강해 53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8  
골로새서 강해 53 

골로새서 3장 16절

그리스도의 말씀


관리자 18-02-04 20:15
답변  
그리스도의 말씀
골로새서3:16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 라는 말씀은 복수입니다. 성경말씀은 항상 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왜 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지금 설교를 듣는 자도 나 혼자 듣고, 성경을 읽어도 나 혼자 읽는데 어떻게 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냐고 따질 겁니다.

민수기 25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우상숭배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3절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알브올과 연합했다는 말입니다. 바알브올과 연합한 자들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여호와의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들 같으면 콕 찍어서 이스라엘 백성 중 바알브올에게 부속된 자들에게만 진노하시면 되는데 왜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 진노하시느냐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아이성 전투 실패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다. 아간이 여리고성 전쟁승리의 전리품을 취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 패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 36명이 아이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의 사고로는 절대로 여기에 동의 못합니다. 우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간 한 사람만 쏙 뽑아내서 제거하면 될 일을 왜 애꿎게 36명이 아간 때문에 죽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이스라엘을 보는 방식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보는 방식의 차이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아들로 봅니다.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각 개인이 개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한 사람의 잘못을 전체의 문제로 끌고 옵니다.

말라기 2:15절을 보면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말찌니라.”

창세기 1:27절을 보면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실상 남자와 여자 합쳐서 사람이라는 겁니다. 참 어렵습니다. 우린 여자도 사람이도 남자도 사람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남자 여자 합쳐서 사람이라고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사람 개념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아담과 여자가 여호와께 변명하는 내용을 보게 되면 한 몸 개념이 없습니다. 그들은 완전 개별적 단독자가 됩니다.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에서 이젠 타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와가 첫 아들을 낳았을 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주어의 자리에 ‘내가’를 집어넣죠. 우리가 아닙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케 되었다는 말에서 아담은 빼 버립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야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했으니 하와의 말이 그 말씀을 믿은 믿음의 고백이 아니냐고 할 겁니다. 물론 이런 말도 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않습니다.

하와는 착각했지요.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으니 자신이 여자이니 자신이 낳는 아들이 뱀의 머리, 자신들의 원수를 값아 줄 것이라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모두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들입니다.

가인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벨에게 부속되기를 싫어합니다. 내가 왜 아벨에게 부속되어야지. 나도 나름대로 수고한 결실을 신에게 드렸으니 신이 나의 정성을 받아야 된다는 입장입니다. 성경에 아벨에게 부속된다는 말이 안 나오는데 목사님은 왜 없는 말을 꺼집어 냅니까라고 따질 분들이 있겠지요.
지옥 가는 자들의 특징이 바로 부속, 즉 연합을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자기 구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 안을 죽도록 싫어합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 버리면 자신의 존재가치가 사라집니다.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루신 일들만이 의가 되기 때문에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철저하게 개인구원에 집착합니다. 이것이 마귀가 준 올무입니다. 그래야만 마귀랑 함께 지옥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언약의 하나님은 철저하게 언약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여자의 후손 속에 모든 것을 묶음 해 버립니다.
골로새서 3:14절에 사랑이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하셨지요. 이렇게 되면 교회가 온 우주를 다 담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주님의 몸을 생각지 않고 자기 몸만 생각합니다.

일부분이 잘못했는데 왜 이스라엘 전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가는 그들을 부르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속한 구성원들은 불만을 토로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잘 못 없는데 왜 나까지 진노의 대상이 되는가?

그러니 철없는 인간이지요. 탐심은 우상 숭배라 했지 않습니까? 이 말은 곧 비록 몇 사람이 바알브올에게 부속했지만 이스라엘 전체가 부속당했다는 말입니다. 아직 기회가 닿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안목은 이스라엘 전체 중 하나라도 말씀에 위배되는 자가 있다면 그 위배가 곧 전체의 위배로 보시는 안목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자신의 구원만 생각하기 때문에 도리어 범죄한 자들에 대해 원망하게 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이런 질문 많이 받아 보셨고 했을 겁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는데 왜 우리가 죄인이 되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니 지옥가도 마땅한 겁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것이 원죄가 아니라 원죄는 아들을 죽인 것이 원죄입니다. 다른 모든 죄는 아들 죽임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죄라는 것이 화살을 쏠 때 과녁에서 어긋났다고 헬라어 의미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게 말해도 됩니다. 그런데 모든 사실이 드러난 지금에서 보게 되면 죄라는 화살은 모두 어디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아들 죽이는 겁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이 죄가 노리는 과녁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지요.
이미 죄가 겨냥하고 있는 지점이 드러났습니다.
죄라는 원천은 여자 후손을 죽이는 겁니다.

그러면 왜 여자의 후손을 죽이려고 할까요? 그 이유는 여자의 후손은 오직 여자의 후손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만을 품을 것 아닙니까? 염병이 일어나 죽은 사람이 장장 이만 사천명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죽은 사람들 인적 사항이 나오지 않습니다. 나이가 고령인 사람 이만사천명이 죽었다고 하면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박수 칠 겁니다. 죽으면서까지 보험금을 남기고 죽으면 얼마나 자식들이 기분 좋을까요? 그것도 장례비용까지 다 해결해 주고.

그런데 그 인적사항이 없습니다. 여기엔 갓난아기도 있을 수 있고, 건강한 장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갓난아기가 무슨 바알브올 제사에 참여하겠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음행하겠습니까?
그런데 무작위로 죽입니다. 그러니 그 원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민수기에서는 그 원망이 나오지 않지만 앞으로 원망이 쏟아져 나옵니다.  저들이 잘못 했는데 왜 내 아이가 죽어야 합니까?

출애굽 때 이미 경험했지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없는 집안 장자는 모조리 다 죽입니다. 감옥에 가 있어도 찾아가 피가 없으면 죽입니다. 무슨 갓난아기가 힘이 있어 어린양을 잡겠습니까? 무슨 갓난아기가 유월절 어린양 피를 문설주에 발라라는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제가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오늘날 사람들이 구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온 회중이 회막문에서 울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 형제에게로 왔습니다.  그때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창으로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인의 배를 꿰뚫어 죽였습니다. 그러자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습니다.

바알브올에 연합된 자를 한 묶음으로 죽였습니다. 그러자 염병이 그쳤습니다.
진작 좀 가르쳐 주시지 왜 이제야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합니까?

이런 식의 사고가 바로 자기 구원밖에 모르는 악마에 속한 자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염병이 그쳤다는 겁니다.
분명 여호와의 명령은 백성의 두령을 잡아 목 베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떠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모세는 바알브올에게 부속한 사람들을 죽이라 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손에 죽은 사람은 비느하스의 창에 죽은 그 한사람 밖에 없습니다. 미디안 여인과 함께 창에 꿰뚫려 죽은 이스라엘 한 사람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호와의 진노가 떠났습니다. 이건 약속대로 된 게 아니잖아요. 분명 백성의 두령을 잡아 목 베면 진노가 이스라엘에서 떠난다고 하셨는데 왜 비느하스로 인하여 여호와의 진노가 끝나느냐는 말입니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이 나오지요. 한 사람 비느하스로 인해 여호와의 진노가 떠났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유월절 어린양을 증거하는 아들로 부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철저하게 한 묶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하실 기능을 보이고자 하시는 겁니다.
비느하스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평화의 언약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세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십자가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고 비느하스처럼 죽이면서 승리하는 승리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지금 제 설교를 들으면서 답답해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면 어떻게 사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겁니다. 그런 생각이 악마적 생각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를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민수기 25장에서 제대로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르지요. 왜? 그들은 그림자잖아요. 실체가 오셔야만 그림자의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밝혀지지요. 그들은 그 부분을 담당했던 겁니다. 비느하스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요한복음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하지요. 그 말씀이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라고 말을 하니 사람들은 마치 빈 고무풍선에 질소를 꽉 채워넣어 저절로 공중에 뜨게 하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거하게 되면 지혜로 가득 차게 되겠지요. 그 지혜는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생이 헛되다는 겁니다. 세리요 창기라는 말입니다.
이런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서로 권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로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만이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모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겁니다.

그러니 우리 모임 잘 해서 좋은 교회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여전히 구약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고방식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나오는 사고방식입니다.

항상 자기 구원, 자기 가정, 자기 교회, 자기 민족, 자기 국가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주어진 지혜, 곧 십자가 지혜 앞에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야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의 대상이 누굽니까? 아들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라고 하니 노래지어 부르고 시를 짓고, 하나님 찬양하는 노래를 작사 작곡하여 부르려고 하는데 그것 아닙니다. 서로 모여 십자가만 자랑하는 모습은 시로 찬미로 신령한 노래로 얼마든지 부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5절에 끝에도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가 나오고 16절 끝에도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가 나옵니다. 17절 끝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말씀이 연속적으로 나오지요. 그 이유는 바로 십자가 앞에서면 감사밖에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이유는 이 땅에 던져진 자체가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기 위해 던져졌기에 자신이 마주치는 모든 환경과 현실들은 감사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신이 구원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모든 환경에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만이 나오겠지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한 교회는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합니다.
문제는 그 가르침과 권면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싸움이 일어나겠지요. 사도바울과 싸우든지 아니면 자신들끼리 싸우든지.

주님은 싸움을 조장하는 분입니다. 그래야 천국이거든요.
천국은 항상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곳이지 인간들의 행복, 구원을 제공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볼 때 오늘 본문 말씀의 명령을 들어서 아름다운교회 만들어 보자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아름다운 교회 만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핵폭탄을 터트리신 겁니다.

눈만 뜨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니라 나의 경험과 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 권면할 때 나의 경험과 나의 지식으로 가르치고 권면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업적을 시로 짓고 찬미하고, 신령한 노래로 만듭니다. 마음으로 감사하기는커녕 늘 불만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는커녕 일이 잘 풀릴 때, 내 마음이 속 시원해질 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비느하스의 질투심이 있습니다. 이 질투심은 주님의 질투심입니다. 오직 홀로 영광 받으시기 위한 질투심으로 자신의 피로 평화의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성도는 이 질투심을 증거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날마다 죽습니다. 이미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에 날마다 죽는 자로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사람들 모든 것들은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모든 것들이 감사로 다가옵니다.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으면 모든 것들은 감사가 아니라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런 자는 모든 지혜가 없는 자, 그리스도의 말씀이 가득한 자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