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1-28 20:20
골로새서 강해 52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28  
골로새서 강해 52

골로새서 3:15절

그리스도의 평강

관리자 18-01-28 20:22
답변  
그리스도의 평강
골로새서 3:15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나옵니다.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리스도 라는 단어는 이 내용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 부음 받았다는 말은 곧 그 분의 기원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한 목소리로 그래 나도 알아. 예수님은 삼위일체 되신 분 중에 성자 하나님이시잖아 라고 할 겁니다.

그런데 이런 발언은 뱀에게서 나오는 발언입니다.

왜 악마적인 믿음이냐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까?

이미 구약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가 등장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메시야의 도래를 어떤 분의 도래라고 생각했는고 하면 다윗 왕 즉 자신들이 이해하는 다윗 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다윗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앞서 말씀드린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유대인적 사고방식에서 이해한다면 이런식이 될 수 밖에 없겠지요. 왜 그렇습니다. 성경은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근거해 메시야를 해석해 보면 대제사장, 다윗 왕, 고레스 왕으로 연결할 수 있겠지요. 대제사장은 다윗 왕에 의해 통합되었으니 다윗 왕으로 보시면 됩니다. 고레스 왕은 이사야 45:1-8절을 보면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 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스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여기에 보면 나의 기름 받은 이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이 단어가 메시야라는 구약 단어입니다.

시편 2편2절에도 나옵니다. 1절부터 보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 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부음 받는 자들은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심지어 아람 왕 하사엘도 기름부음을 받는 자가 됩니다. 대제사장이나 왕만이 기름 부음을 받는 자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 사용되는 자들조차도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런 말씀들이 거북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그리스도라는 용어가 적용되려면 뭔가 깨끗하고 깔끔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실체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에 나타난 기름부음 받은 자들은 모두가 다 그림자입니다. 대제사장도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시적이고 자기 죄를 없이 하지 못하는 대제사장 역할을 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는 분이 영단번 제사를 드리셨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다윗 왕도 아니지요. 실체되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다윗 왕을 보면 좀 맞지 않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정치적 왕이 아니잖아요. 땅을 정복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방 나라를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들을 복속시킨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가 보기엔 신약이 그림자같고 구약이 실체 같잖아요. 실제 있는 왕, 실제로 다스려지는 백성, 실제 정복한 땅, 실제로 굴복하는 이방인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이 그림자라고 하니까 오해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실체 되신 예수님에 의해 구약을 바라보게 되면 구약은 그야말로 너무나 실질적입니다. 딱 우리 인생들이 바라는 왕국입니다.

기름부은 받은 왕 페르시아 왕 고레스만 봐도 그렇잖아요. 다니엘 9:24절에 나오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예언도 고레스 왕과 같은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는 기대를 충분히 가지게 해 줍니다.

이사야 61:1-3절을 보면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보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의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컫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4절 이하를 읽어보면 정치적 메시야임이 더 뚜렷해 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체되신 예수님, 메시야, 곧 그리스도의 등장은 인간의 기대를 무참히 뭉개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평강에서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의미를 12절에서 아주 짧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심을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어디에도 기름부음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이사야 61:1절에서는 성령의 임함과 기름부음이 동시에 나옵니다. 그러면 성령도 받으시고 기름부음도 받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성령을 받으셨지요. 그러니 문자적으로 대응해서 구약과 신약을 연결 지어도 소용없습니다. 항상 단절입니다. 건너 띄면 이 세상에서는 다 반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셨지요. 그런데 성령을 언제 받았습니까?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을 받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의 물세례의 의미는 마태복음2:11절에서 회개케 하기 위한 물세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회개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 분이 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인간의 회개는 반성 외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회개는 반성이 아니라 육에서 영으로 점퍼하는 겁니다. 공간이동입니다. 세력권의 이동입니다.
죄 없는 분이 물세례 속에 들어오셔서 죄 있는 육신을 입으시고 성령을 받으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 회개, 즉 그림자로 외쳤던 세례요한의 회개의 실체를 알게 하십니다.

이런 일은 오직 기름부음 받는 자 곧 메시야, 곧 물세례와 성령세례, 불세례를 동시에 받으신 분만에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물세례 받으신 분에게 성령의 임하심이 곧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임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그 내용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지요. 물세례 받으신 성령세례 받으신 예수님이 바로 언약의 완성자라는 말씀입니다.

이 분이 이 땅에서 살아간 모습, 즉 그 내막이 바로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입니다. 이것을 인간과 신의 공유적 속성이라고 사람들이 부르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은 반드시 승리를 가져옵니다. 어디에서. 십자가에서. 그것이 골로새서 2:1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승리의 결과가 바로 용서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도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으로 옷입어서 용서하라고 했으니 예수님처럼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악마적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지난 주 말씀드렸지요. 우린 증인입니다. 증인과 본인은 달라요. 고레스 자신이 메시야입니까? 모양은 메시야 맞지요. 다윗도 그렇고 대제자상도 그렇고, 하사엘도, 엘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니엘에서 예언된, 시편 2편에서 말씀하시는 그 메시야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림자에도. 그러면 그들에게서 나오는 기능들은 모두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기능들이죠.

그들이 나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살았다고 주장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주께서 사용하시는대로 그림자 노릇을 충실히 하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그림자입니다. 전도서7장이나 역대상 29장에서 우리를 그림자 인생이라고 한 이유가 증인이기 때문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용서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나오는 것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니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라는 것은 증거하는 믿음말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명령하니 이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지켜야지요. 지켜 보세요. 내가 지킬 수 있는가?
이 사람들은 글자도 못 읽어요. 이 평강은 나의 평강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평강입니다.

소유권이 우리에게 없어요. 아무리 내 소유로 삼으려 해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 예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항상 우린 잊어요. 뭘 잊어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 잊어 버려요.
성도가 누굽니까? 그리스도의 몸이지요.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잖아요.
한 몸이라는 것이 그냥 한 몸입니까? 좋은 공동체 이루자는 겁니까? 아니지요.

여기에서 나오는 한 몸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명령을 누구에게 하시는 겁니까?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즉 주체가 살아있는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주님이 기름부음 받은 희락의 기름을 부어주신 겁니다. 성령을 부어주신 겁니다.

세상의 초등학문과 함께 죽었고 장사된 자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들, 즉 주님이 사시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성경말씀은 영을 받은 자만 알아 먹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또 이렇게 말하면 나는 영을 받았으니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2:13절에서 영의 일은 영으로 분별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린 빠져라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주님 홀로 일을 다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 일을 증거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하심을 주님의 몸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모든 일을 인간이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몸을 갖고 친히 공생애의 삶을 다시 보여 줍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에서 두 가지도 나옵니다. 영이 일을 하게 되면 당연히 육은 부인당하겠지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이 평강을 개인적인 평강으로 받아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 예수님을 믿으니 참 평강하다 라고 해요. 개인이 누리는 평강이 아닙니다.
요즘은 자본만이 최고인 세상이기에 자기만 살면 됩니다. 과거에는 북한과 올림픽에 한 팀이 된다면 대부분이 환영했습니다. 물론 세뇌효과도 있겠지만 그래도 공동체 개념이 조금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 것은 무조건 반대해요. 이게 왜 그런고 하면 인권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아담안의 인간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과거가 좋았고 지금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디모데 후서 3:1 절에 말세에 자기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 사랑의 모습이 돈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성경말씀도 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받아 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개인이 없어요. 이스라엘도 단체고, 아브라함도 단체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도 단체입니다. 개인이 없어요. 왜 그런고 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 단독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이것을 치고 들어 옵니다. 단독자들끼리 모이면 평강이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누군가 지배를 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구약 성경에 보면 평강이 있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바로 솔로몬 왕 때입니다.

역대상 22:9절을 보겠습니다.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다윗 언약의 성취에 대한 그림자를 미리 보여 주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솔로몬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좀 알아 들어야 하는데.
솔로몬이 평안과 안정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실제 평안은 누가 이룹니까? 솔로몬 왕이 이루잖아요. 열왕기 상 2:46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그런데 실은 여호와께 복을 받은 결과물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눈에는 이 모든 평강이 다윗과 솔로몬이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분명이 주님께서 솔로몬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다음 단계로 가 봅시다. 이 평안은 어떤 평안입니까?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평안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솔로몬왕이 만든 정치, 경제, 종교적 평안의 세계를 맛본 자들, 역사를 기억하는 자들은 이 맛을 잊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신다면 바로 이런 평안의 세계가 도달 할 것이라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마귀로부터 시험 받으실때에 이런 평안은 악마가 제공하는 평안이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우리를 실망시키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고 합니다.
분명 구약 성경에 주신 평안, 샬롬은 세상이 주는 평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요.

그렇게 우리에게 모델을 만들어 놓으시고나서 그 모델은 그림자요, 박살날 모델이라고 말씀하시면 어느 누가 믿겠습니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시겠다는 십자가의 피로 주어지는 평강은 결코 받아 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차라리 솔로몬 같은 왕, 다윗 왕 같은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평강을 누리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평강을 만들었습니다. 그 평강은 전쟁을 통해 획득한 평강입니다.

민수기 25:11-12절에 보면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아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 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했습니다.
비느하스는 바알 브올에게 속한 자들 죽여서 속죄했지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드려 속죄하셔서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완성하셨습니다. 그 진분을 두고 여호와의 평화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여 질투하시여 자기 몸을 드려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제사장 언약, 곧 평화의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반드시 평화의 언약을 보여주는 몸으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부름받은 자들을 덮고 있는 것은 바로 평화의 언약, 곧 십자가 언약입니다.

평안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씀은 한 몸이 목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한 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너희들 싸우지 말로 서로 용납해서 평안하게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그리스도의 평강을 증거하기 위해 너희들에게 그리스도의 평강을 주셨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평강을 증거하기 위한 부르심의 목적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된 교회는 십자가의 피만 자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