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1-21 21:32
골로새서 강해 51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70  
골로새서 강해 51

골로새서 3장 12-14절


관리자 18-01-21 21:33
답변  
옷 입고, 피차 용서하고, 사랑을 더하라.
골로새서 3:12-14
전도서 6:12절에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선-토브)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사람의 일평생을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이라고 합니다.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의 일평생은 헛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전도서를 읽으면서 찾아내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고 하면 어떻게 하면 헛된 일평생을 살지 않는가입니다. 여러분들도 전도서를 읽어 보셨지요. 읽으면서 무슨 결론에 도달했습니까?

그래서 일평생은 헛되니 죽기 전에 심판주 되신 창조주를 기억하자에 도달했습니까?

그런데 만일 그렇게 결론이 나게 되면 전도서를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결국 우리 구원을 위해 주신 것이 되지요. 우리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음을 역설하는 말씀이 전도서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잖아요.

그런데 전도서는 거꾸로 말합니다. 그렇게 정답을 찾아낸들 헛되다는 겁니다. 우린 정답을 알면 헛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줄기차게 그 알아냄조차 헛됨 속으로 몰아갑니다. 왜냐하면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너흰 결코 아버지께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시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수 없다고 하셨지. 그래 나 예수님 믿겠어. 드디어 길을 찾았어. 진리를 찾았어. 생명을 찾았어. 난 이제 천국백성이야. 천국 갈 수 있어.

요한복음 14:6절을 읽게 되면 누구나 갖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전도서에서는 이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면 헛되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하면 전도서 7: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죽음이 산 것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산자가 죽음이 사는 것 보다 낫다는 것에 마음을 둘 수 있을까요?

유대인들은 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뭔지 몰라서 그래요. 우리도 이 말씀을 읽으면 그래 이제부터 죽음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지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이미 살아 있다는 겁니다. 타종교에서 말하듯이 죽음 후를 생각하면서 오늘을 살아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 문제 해결서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는 말씀은 나만이 유일인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바람이라는 겁니다. 안개라는 겁니다. 이것을 전도서에서 헛되다는 겁니다.

솔로몬 왕이 인생을 살아 보니 늙어서 뒤를 돌아보니 인생의 지혜를 설파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전도서를 기록했습니다. 이런 것도 성경구절 가져와야 자꾸 믿으려고 하니 참으로 답답할 뿐입니다. 그런데 가져와야지요. 그래야 우리의 악함이 드러납니다.

베드로전서 1:10,11절입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헛된 생명의 모든 날,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을 십자가를 증거하는 인생으로 살았다는 겁니다. 누가? 솔로몬 왕이 말입니다.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보기엔 솔로몬 왕이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이 들리겠지만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 솔로몬 왕을 사용하신 겁니다.

성경 모든 말씀은 십자가로 그 목적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못하고, 목적이 되지 못하고 그 방향을 틀어 사람에게 관심이 간다거나, 교회에 관심이 가게 된다면 그는 자신의 인생이 헛되지 않다는, 가치 있다는, 그림자 인생이 아니라 실체 인생이라고 우기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게 되면 사람들은 당장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말씀들은 문법적으로 명령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사실 그 말이 맞긴 맞아요. 만일 죄의 종이 아니라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맞아요. 문제는 굴절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릴 때 냇가에서 물놀이를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낚시도하고 그랬는데 낚시하면서 신기했던 것은 낚시대를 물속에 집어 넣으면 갑자가 낚싯대가 꺾여 버려요.

인간 자체가 이미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런데 누구만이 오늘 본문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죽은 자 만이 오늘 본문 말씀을 알아들어요.
2:20절을 보면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서 사는 것가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3:3절에서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고 하십니다.

로마서 6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다고 4절에서 말씀합니다.

따라서 성경말씀은 자신이 살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들려지지 않습니다. 오직 죽은 자, 즉 헛됨 속에 담겨 있는 자들에게만 들려집니다.

마태복음 8:21-22절입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마치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을 때 일어난 사건과 흡사합니다.

지난 주일 오후 성경 공부할 때 살펴보았지요. 엘리야는 보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안 보여요.

지금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이 사람에겐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입니다. 영의 세계는 안보여요. 그러다 보니 그는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부모 장례식은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겁니다.

엘리사가 부모에게 하직인사 올리고 오겠다는 것에 대해서 엘리사가 너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납득이 안 되잖아요.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인사한번 드리고 오는 것이 뭐가 문젭니까?

바로 이런 생각이 문제라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나 엘리야 당시나 동일하게 무엇이 신의 자리, 주의 자리에 가 있습니까?
자기 구원입니다. 자기 영생입니다. 그 영생 곧 축복을 받기 위해 산당 제사 드리고 여호와 하나님 믿고, 선지자를 찾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방문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언약이 아닙니다. 제자 되고자 하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성공, 가족 화목입니다.

여러분에게 이것보다 소중한 것 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더라도 천륜을 저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고방식 자체를 죽음이라 하십니다.

죽은 자에게 죽을 자를 장사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보면 전도서와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동일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 어떤 인간도 죽은 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안다면 그의 눈엔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보일 겁니다. 그런데 자신이 산자로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도 존재, 부모님도 존재로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들을 어디로 묶음 합니까? 죽은 자로 묶음 처리 해 버립니다.

듣는 효자 화 납니다. 그런 예수 필요 없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 집안에 분란을 가져오는 예수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복음을 전해 보면 여러 가지 일들을 겪게 되는데 처음 복음을 전하면 너무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까지 교회에 충성봉사한 것이 힘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자유케 되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복음이 그 자신을 푹 찌르고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내 집안은 건드리지 마라. 처갓집은 건드리지 말고 시집만은 건드리지 마라.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겉 무늬만 죽었어요. 속은 살아서 팔짤팔짝 뜁니다.

엘리사는 죽음 속으로 합류합니다. 엘리야의 겉옷을 취했다는 것은 엘리야의 부재가 활동하는 몸으로서의 활동이 엘리사의 활동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이 세상은 끝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원 챙기고, 아버지 챙기고, 아들 챙기고, 돈 챙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입은 자들을 보세요. 챙길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되니 모든 것이 죄로 드러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심판 주 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문둥병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증거하시는대로 사용되어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문둥병자는 평생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임을 증거하면 되는 겁니다. 물론 어린양의 피도 동시에 증거하겠지요.

오늘 본문말씀은 죽은 자들에게 주시는 명령법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대학생 때 상여 매는 일이 좀 있었어요. 매장할 때 보면 관 뚜껑을 열고 흙을 담잖아요.
그때 죽은 자가 잠깐. 흙 살살 부어라고 합니까? 물론 산 자들이 알아서 살살 부어요. 아플까봐.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죽은 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협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2-14).”

죽은 자는 말이 없지요. 그러면 이 말씀은 주님이 자기 증거를 위해 죽은 자, 즉 함께 살린 그리스도의 몸을 향해 하는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에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이 말씀 앞에 예수님이 만드신 우리와 부딪치게 되지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처럼 살아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요.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온전해 진다고 주장을 하든지 아니면 이 말씀대로 제대로 사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상급차등이 있다는 식으로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자 이제 말씀을 본격적으로 풀어 봅시다.
먼저 죽은 자에게 하신 말씀임을 잊지 마시고, 그 다음 이 말씀은 단독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만일 이 말씀이 각 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이 되어 버리면 이 말씀은 도 닦는 불교신자나 도교신자와 다를 바 없이 됩니다. 그런데 긍휼, 자비, 겸손, 오래 참음, 용서 라는 이 용어는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0:29절에서 어떤 율법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 말씀처럼 행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질문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미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이미 사랑하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겁니다.

나 잘했지요. 나 옳지요. 칭찬받으려고 질문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아이들도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라고 하지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 강도를 만났습니다. 옷도 벗겨가고 때려 거의 반 죽여놓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때 마침 한 제자장이 지나가다 보고 피해 가버리고, 레위인도 보고 피해 가버렸습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 중에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만일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했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과 관련되어 있기에. 그러니 이젠 마치고 가는 중이니 바쁜 일 없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인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바쁘겠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사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 즉 이틀 노동댓가를 주막 주인에게 주며 그 사람을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 아주 바쁜 사람이에요.

예수님께서 질문합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자비를 베푼 자라고 하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이 사람이 어떻게 했을까요?
자신이 이웃이 되기 위해 강도만난 자 같은 자를 찾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상대가 이웃사랑을 요청할 때 이웃 사랑이 됩니다. 만일 내가 접근해서 사랑해 버리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상대 마음을 알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강도만난 자 같은 사람을 도와주면 이웃 사랑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이 세상에서의 사고방식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몰라요. 입으로 아무리 고맙다고 해도 그것이 고마운 것인지 아닌지 모르잖아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용서는 육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성령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옷입고 라는 중간태 동사 명령형이 나오는 겁니다. 즉 육은 절대 지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즉 주님이 이 말씀을 육을 갖고 드러내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옷일 입혀 버리는 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이 드러나는 육은 끝까지 육으로 남겨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옷을 입혀서 피차 용납하게 하십니다. 그 용납은 주님이 하신일이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용납하신 것처럼 피차 용납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어느 누가 주님처럼 용납할 수 있습니다. 육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만이 피차 용납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는 자신을 뭐라고 고백하겠습니까? 주님이 하셨습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라고 하겠지요. 이 뿐만 아닙니다. 이것도 잠시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렇게 행한 것을 자기 의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또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든 저렇데 죽은 자의 모습만 드러내고 살아계신 분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주님되신 예수님밖에 없음을 드러내는 일평생이 됩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 우릴 헛된 생명의 모든 나를 그림자처럼 보내는 일평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14절에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지요. 그 사랑이 십자가 사랑이잖아요.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으로 옷입고 피차 용납, 용서하는 것을 사랑으로 묶으라는 겁니다.
즉 십자가 피만을 증거하는 몸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세상 초등학문에서 죽었다고 하니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명령법 같은 것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젠 자유다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자유가 누구를 위한 자유입니까? 십자가 증인을 위한 자유입니까 아니만 자기 자신을 위한 자유입니까? 

인간들은 항상 자기 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 백성을 우리로 불렀습니다. 우리로 불러서 끊임없이 죄만 만들어 내게 합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긍휼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으로 옷입혀서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하는 식으로 죄를 만들어 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 십자가의 피로 꽁꽁 묶으라는 겁니다.

성도로 부르신 이유는 예수님 닮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 증인되게 하기 위해서 불렀습니다. 그래서 개별로 부르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렀습니다. 개별로 불러버리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도닦는 말씀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도 닦는 , 자기 구원을 위한 말씀으로 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몸으로 불렀습니다. 몸으로 불러 버리면 끊임없이 죄가 터져 나옵니다. 못뚝이 터진 것처럼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죄가 흘러 넘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피가 증거 됩니다.

우린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차피 우린 죄인이니 죄만 짓자고 하니 자기가 아는 죄만 생각하고 그 죄만 지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옆에 와서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질문하는 율법사와 같은 태도입니다. 피동이 아닙니다. 자신이 주의 자리에 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아는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만들어내는 죄를 짓게 만들어서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십니다. 주님이 친히 우리의 이웃이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우린 성한 곳 하나 없는 피투성인 강도만난 자, 곧 죄인중의 괴수로 말씀은 우리를 만들어 내십니다.

이것은 십자가로 완성하신 그 완료의 세계에 들어간 자들만이 누리는 혜택입니다. 천국 백성만이 누리는 특별혜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