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3-03 21:42
스가랴 강해 14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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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삼십

스가랴11장1-17  음성설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이런 기분 들 때 있습니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아주 사이가 좋았습니다.

복음 때문에 서로가 형제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나누고 도와 주었습니다.

한 마디 말만 하면 상대의 마음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쪽에서 상대를 보니 마치 자기 이익만 챙기는 자 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상대도 그 사람을 보니 똑 같아 보였습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각자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이 과연 복음을 아는 자일까?

예수님을 믿는 자 일까?

그 후로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말씀을 나누지만 말씀은 마치 다른 나라 이야기 처럼 들릴 뿐입니다.

십자가의 피흘리심에 대한 감사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분노만 가득합니다.

저런 인간이 어떻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가?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형제를 돌아보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가?

이 두 사람은 지금 우리들이 듣고 있는 복음과 동일한 복음을 전하고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인간의 행위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행위를 꺼집어 내는 자체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라 생각한 사람입니다.

오직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외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사이에 도움을 받는 자가 도와 주는자로 상황이 만들어 졌고 그 상황이 도움 받는 자의 만족을 채우지 못함으로 속에서 분노가 일어 났습니다.

도대체 십자가 복음이 무얼까?

이렇게 어렵게 사는 자신을 받아 주고 이해해 주고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 아닌가 생각한 것입니다.

갑작 스럽게 신학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지요.

지금까지는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는 복음, 아버지와 아들이 세우시고 이루신 언약속에서 세상을 보았고 옆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 몸의 문제가 발생하니 자신의 몸을 떠나 이루어진 언약이 완성을 자신의 몸과 관련시키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말씀하실 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여서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거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찌해서 우리 몸을 떠나 우리와 상관없이 언약을 이루셨습니까라고 반박하실 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까?

그가 다시 살아 났습니까?

자신의 몸과 상관없이 일어난 언약의 완성이었습니다.

그 언약의 완성이 바울몸에 덮친것이지요.

이렇게 되니 바울은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증인으로 살아가는데 그의 발언 하나하나가 십자가 지신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발언이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본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드러 내고 싶어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렇게 꺼집어 내신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수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마치 우리들 마음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삶의 모습을 거침없이 말하지요.

그러나 그러한 모든 말씀이 바울은 십자가 증언용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우리 몸과 상관없다는 말의 의미를 아시겠지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이루신 그 언약의 완성이 성도에게 덮쳐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니 바울처럼 성도는 끊임없이 십자가 지신 주님만 전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그렇게 우리들의 본성이 갖고 있는 말을 많이 했을까요?

예를 들면 사랑, 용서, 그리스도의 형상, 소망 등등 말입니다.

마치 구약 율법을 새롭게 정의 내려 십자가 안에서 새로운 법을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법의 차원 아니면 우리속에서 반들이 일어나야되는 행위로 이런 말씀을 대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행위로서 말씀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 높이, 길이를 알아가는 차원에서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게 되면 짜증이 확 올라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말 목사님 말씀대로 좀 봅시다.

말씀이 있는데 당신은 왜 말씀대로 읽지않습니까?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씀이 우리 몸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더 열 받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삶이 그 모양 그 꼴 아닙니까?

도무지 빛의 모습을 찾아 볼수가 없네요라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지 못합니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인간의 행위도 뻔합니다.

직접 안 봐도 뻔하지요.

왜그렇습니까?

지금 열내는 모습이 자신의 주장과 반하는 모습아닙니까?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 준다고 했는데 허물을 덮어 줄 생각은 않고 행동이 왜 그모양입니까라는 열받는 모습을 보이지요.

이렇게 하면 당신은 말만 앞선다라고 할 것입니다.

행위가 없다고 하겠지요.

이정도 되면 이 사람은 걸려 든 것이지요.

행위책 말입니다.

행위책은 철처하게 율법을 근거로합니다.

바울의 소위 명령법을 근거로 합니다.

그런 행위를 주장하는 자들은 항상 모든 것을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자들이지요.

그렇지도 못하면서 행위를 꺼집어내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말하는 것 아닙니까?

십자가 안에서 말하면 십자가만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어디에 행위가 나올수 있습니까?

이 정도 논쟁이 되면 폭발해 버리겠죠.

제가 앞서 예를 든 그런 사건이 일어납니다.

영원히 갈라설 준비를 완료한 것이지요.

오히려 행위를 주장하는 자는 자기 기준에 미흡하게 산 사람을 정죄해 버리고 꼴 도 보기 싫다고 할 것입니다. 얼마나 모순입니까?

예수님을 닮았다면 오히려 기도해 주고 안아주고 덮어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논리에 의하면 말입니까?

이정도 되면 한 대 얻어 맞을 것입니까?

이제 왜 이런 말을 길게 하는고 하면 오늘 본문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너무하다는 말입니다.

뭐가 너무하냐 말입니까?

아예 양떼를 먹이는데 잡아 먹힐 양떼를 먹입니다.

누가 말입니까?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지요.

잡아 먹힐 양떼를 왜 먹입니까?

양떼들은 완전히 놀이개입니다.

5절을 보세요.

산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 없다 하고 판자 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 도다.

이렇게 당하게 하기 위해 양떼들을 먹였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선택받은 백성들이지요.

6절을 봅시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이 붙이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기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7절입니다.

“내가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쌔”

8절이니다.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목자나 양떼나 한 통속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대로, 망할 자는 말할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먹는대로 두리라 하고”

이런 목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이런 목자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언약을 패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댓가를 한번 계산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은 삼십 을 달아 주었습니다.

여호와를 헤아려 , 드린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져 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께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형제의 의도 끊어 버렸습니다.

형제의 의가 끊어졌다는 말은 원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스가랴도 또 배우로 나섭니다.

악한 목자역할을 합니다.

16절입니다.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그야 말로 초토화시켜 버립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쭉 나열했는데 한번 정리 해 봅시다.

잡아 먹힐 양떼를 왜 먹였습니까?

잡어 먹히게 하기 위해 먹였죠.

그런데 이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신 댓가를 은 삼십으로 계산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잡아 먹히는 것이 당연하죠.

이들이 잡아 먹히지 않으면 더 이상한 것이죠.

이스라엘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신약으로 넘어 와야 하죠.

은 삼십을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가롯유다가 떠오릅니다.

마태복음 26장14-16절입니다.

“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유다는 이스라엘의 축소판이요 온 인류의 축소판입니다.

즉 대표자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셔서 제자의 역할을 감당케 하셨지만 그의 눈에 예수님은 은 삼십의 값어치 밖에 안됩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율법과 성전을 주시고 선지지를 보내신 이유는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의 정체를 밝히시겠다는 의도입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의 정체는 이렇다는 것이지요.

구원받고, 용서도 받고 기적도 보고, 율법도 지켜보고, 제사도 드러 보고 했지만 결국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은 삼십의 값어치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가룟유다가 우리죄인들의 대표자로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먹은 것이지요.

그러니 인간은 볼 것 없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한가지 더 풀어야할 숙제가 있죠.

구약백성이 그러했고, 가룟유다가 그러했다면 우린 어떻습니까?

그들은 십자가 전이었고 우린 십자가 후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린 약간의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러니 성령받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합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지를 통해 우리의 정체를 밝혀 내셨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주님은 은삼십의 값어치, 즉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마땅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들이 주님을 대하는 본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인. 죄인 중의 괴수.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우리를 유혹하는, 다른 사람과 비교를 일으키는 말씀들은 무슨 기능을 합니까?

똑 같습니다. 은 삼십의 가치로 주님을 대하는 우리의 본 모습이 드러나게 하는 말씀, 십자가에 못박는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그 말씀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죄라는 것은 그냥 추상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랑하라, 용납하라는 말씀이 개입되면 죄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에서 번개처럼 선명하게 노출됩니다.

죄인이라는 말만 있고 사랑하고, 인내하라, 용서하라, 기도하라는 말씀이 없으면 인간들은 그냥 무감각하게 죄에 대해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헌금을 언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문제, 돈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민감합니까?

돈 이야기를 해야 내가 주님을 은 삼십의 값어치로 대하는 구나를 알게 됩니다.

용납하라라는 말씀을 들어야 내가 주님을 은 삼십의 값어치로 대하는 구나를 알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렇게 활동하십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은 삼십의 값어치로 대하는 ,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인임을 끊임없이 들통내십니다.

그러니 소위 말하는 사도바울의 명령법의 말씀들을 모세가 불붙는 시내산에서 받은 그 계명과 동일한 차원에서 말씀을 대하는 자가 참 성도입니다.

이런 자는 스가랴 11장에 나오는 은 삼십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될 것입니다.


최양순 11-06-14 22:05
답변 삭제  
세상에...@@
어떻게 제자가 되가지고서 자기 스승을 은 삼십에 팔 수가 있을까 그것도 죽는데 내어줄
수가...하며 유다는 불신자에 최고 악당인줄  알고 있었는데,
유다 대목을 읽을 때 얼마나 분개했었는데 그게 바로 나라니!

우리가 얼마나 악역을 싫어하는지...
심지어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실제 연기자를 보고 욕을 한다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