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12-04 12:17
다니엘 강의 제 10 강 a 짐승에서 인간으로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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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강의 10 강 a


관리자 15-12-04 12:18
답변  
제 10강a

다니엘 7장입니다.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 연대가 뒤돌아 갑니다. 6장에는 ‘다리오’라 되어 있는데 5장에 보면 벨사살 왕이 나옵니다. 보통 5장, 6장, 그 다음에 7장으로 세월이 그대로 흘러가야 하는데 5장, 6장으로 갔다가 다시 뒤로 돌아갑니다. 벨사살 원년이 대략 550년으로 봅니다.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야, 꿈 나오면 골치 아파요. 남 꿈꾸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꿈꾸면 문제가 됩니다. 남이 꿈꾸면 개꿈입니다. 일반 사람이 꿈꾸면 개꿈인데 다니엘이 꿈꾸면 개꿈이 아니고 청사진, 하나님의 설계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설계도가 꿈에서 튀어 나옵니다. 그 계획도가 나오면서 우리에게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 계획도 사이에 크나 큰 문제점을 야기 시킵니다.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투표했습니까?’ 라고 어떤 사람이 물어보면 ‘나는 내가 투표한 자가 당첨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 투표하겠습니다.’ 이렇게 답변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뭔가 문제가 있죠? ‘내가 눈으로 당첨된 것을 분명히 확인한 후 그 다음에 내가 투표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내 투표가 사표가 되지 않고 효과 있는 표가 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듣는 사람이 ‘이 사람은 시간 흐름 자체를 지금 무시하는 바가 된다.’ 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럴 때 ‘당신은 그런 답변은 잘못된 답변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기 때문에 그건 말이 안 됩니다.’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말이 안 되는 식으로 하나님을 지금 알고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히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에는 우리의 선택과 의지가 개입이 안 됩니다. 투표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개입이 안 됩니다. 투표하고 난 뒤에 개표를 해야 누가 되든 되는데, 투표하고 난 뒤에 결과보고 내가 투표하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손대기 전에 이미 결정이 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알고 ‘아! 저리 가야 구원받는구나. 나는 구원받는 쪽으로 움직여야지.’ 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 전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2천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대선에 누가 될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이미 결정됐다는 말입니다. 결정됐기에 내가 어떻게 투표하든 상관없이 결정될 자는 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역사에는 그것이 안 통합니다. 우리가 젊은 사람이 투표해야 우리가 밀어주는 사람이 당첨이 된다는 것이 우리의 역사 속 논리입니다.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역사의 주체라 합니다. 역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반드시 역사의 주체를 같이 연결시켜서 이야기합니다. 나의 역사의 주체는 나다. 회사의 역사 주체는 사장님이고, 항상 무슨 역사가 있으면 반드시 주체가 있습니다. 교회에 역사가 있으면 교회의 주체가 있습니다. 경찰서에 가보세요. 경찰서에 가보면 역대 경찰서장 사진이 나와 있습니다. 소방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도 역대 회장님이 나옵니다.

그것 즉, 그 회장님의 사진과 사진의 연결고리가 역사를 이루고 주체는 사진에 박힌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동안 회사를 이끌어 온 주체가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역사는 반드시 그냥 역사라 하지 않고 역사를 이끌어 온 영웅, 주인공이 누구냐고 반드시 묻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영웅이 누구냐에 대해서 우리가 만약에 표를 한 표 던진다면, 그것은 이 대한민국의 역사의 주체에 누가 가담하게 된 것입니까? 우리가 가담한 셈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대통령 잘 뽑아서 일이 잘 되면, 그건 다 누구 탓이다? ‘역시 표를 잘 던졌구먼.’ 만약 일이 잘못되면 ‘그때 국민의 선택은 잘못이었어.’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꿈을 꿨습니다. 다니엘이 열심히 일했더니만 꿈을 꾼 것이 아니고, 그냥 다니엘은 잠만 잤을 뿐인데 잠 잔 그 시간에 꿈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꿈은 다니엘이 주체가 되어 꿀 수 있는 꿈이 아닙니다. 다니엘을 사용하사 하나님이 역사의 주체임을 알려주는 하나의 agent, 중개인으로서 다니엘을 이용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니엘이 아닌 것을 천만 다행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밤마다 꿈 꾼 것이 agent라면, 계시 꿈이라면 여러분들은 몸살 날 것입니다. 꿈을 어떻게 처리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우리가 마리아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처럼 배가 불룩해서 결혼도 안 했는데 임신해 보세요. 마리아는 그냥 agent입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는 도구로 쓰여 지는 것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는 인간의 평가에 주눅 들지 않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는 보내심의 지시가 너무 강렬하기에 주변에 엮어져 있는 부부관계, 가족관계, 이런 것에 대해서 구애받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나오면 나는 이렇게 나오겠다.’ 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든 저렇게 나오든 나는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됩니다. 이 좁은 길로! 당신은 넓은 길로 가든 좁은 길로 가든지 마음대로 하는데 나는 내 맘대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당첨됐으니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꿈을 꾼다는 자체가 바로 역사의 위기가 됩니다. 역사에는 누가 있다 했습니까? 주체가 있습니다. 이 역사의 주체를 누가 공격한다? 묵시의 주체가 다니엘을 통해서 나타나면 묵시의 주체가 역사의 주체를 공격합니다. 그러니까 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떨어졌습니다. 노아 홍수 때 물 떨어졌습니다. 왜 지금은 죄가 관영한데 물이 안 떨어지고 불이 안 떨어집니까? 그 이유는 누가 기둥처럼 받치고 있다 했습니까? 누가 받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걸 받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은 경악스러운 그런 대자연의 변화 속에 있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십자가가 뜻을 다 해버리면 하늘에서 그냥 유황불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이 우리가 노력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십자가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빼버리면 절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빼버리면 맨날 본인이 역사의 주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불평, 불만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질 않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주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묵시와 역사의 만남에서 위기가 옵니다. 위기가 어떻게 옵니까? 2절에 보면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바람이 분다는 것은 여기서부터 심판의 조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람 부는 것은 그냥 부는 것이 아니고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어떤 변화를 야기 시키는 공기에너지가 집중하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서 숨어있는 실체를 드러냅니다. 그것이 3절에 보면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옵니다. 바람이 안 불면 이들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다 속에 잠수함처럼 잠겨있습니다.

그러면 땅의 역사에서 볼 때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그 정체가 보이지 않다가 드디어 심판의 바람이 부니 짐승이 드러납니다. 특히 심판의 바람이 네 바람입니다. 넷이라는 것은 동, 서, 남, 북, 전체를 하나도 빠짐없이 통째로 지상의 모두를 관할하고 지배하는 그 심판의 지배로 인하여 드디어 심판받기 위해서 수면속의 실체를 불러냅니다. 불러내는데 나오니 짐승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 법원에 하도 죄인이 많아서 법관이 재판하는데 바쁜데 언제 짐승까지 불러내서 재판할 수 있겠어요? 사람 재판하는 것도 힘든데. 짐승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적었죠? 제가 이 앞의 것을 지우겠습니다. 그러면 (  )을 심판. 이것만 남겠죠? 자, 심판합니다. 앞의 (  )를 채워보세요. 뭐로 채우겠습니까? ➀번 나쁜 놈 ➁번 배신자 ➂번 불신자 ➃번 하나님을 훼방하는 인간. 어쨌든 우리가 생각하는 심판은 ~~하는 인간, ~~인간, ~~인간, 우리의 심판은 인간만 심판하는 것이 고정관념입니다. 역사에서.

세상에 아무리 북한의 판결이 무섭고 중국의 공산주의 판결이 무섭다 할지라도 ‘여봐라, 귀신을 대령하라.’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귀신을 수갑 채워서 데려오라.’ 이런 것 없잖아요. ‘귀신은 이 앞에 와라. 귀신은 무릎을 꿇고 네 죄를 알렸다.’ 이런 것은 없다 말입니다. ‘귀신은 곤장 30대를 맞아라.’ 이런 게 안 된다 말입니다. 귀신인데? 안 되잖아요. 벌  준다 할 때는 누구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인간에게만 해당됩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해 악한 것을 제거하는 작업을 병행하게 됩니다. 나쁜 것을 제거해서 자꾸 좋은 것만 남겨서 점점 더 그것이 선행 작업이 되고 그 선행 작업이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것만 모아서 후대에 가면 그 좋은 것만 모여 역사가 질적으로 좋아 진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입니다.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법칙. 변증법적 유물론. 이런 게 있어요. 사적 유물 역사론 이런 곳에 보면 나와요. 헤겔의 정반합을 위해서 자꾸 좋은 쪽으로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는 갈수록, 갈수록 질이 더 나아지겠죠. 그래서 심판이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를 심판한다.’ 하는 이것이 역사에 있어서는 상식인데 여기에 갑자기 뭐가 나옵니까? 짐승이 나와 버립니다. 그런데 짐승을 심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여기 (  )에 (미지 X), 다른 말로 하면 (없는 것), 그럼 없는 것을 심판한다는 말은 그 뒤의 심판은 기존에 행했던 심판이다? 아니다? 기존에 행했던 심판이 아닙니다. 인간이 행할 수 없고 인간의 판사, 검사가 할 수 없는 심판을 친히 누가 하신다? 다니엘에게 계시내린 하나님이 친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 하는 것은 지상에서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럼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어느 심판에서 벗어나는 걸 의미합니까? 인간이 하는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짐승을 심판하는 그 기준에서부터 우리는 해방되고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 있는 강도는 강도짓해서 심판받았죠? 심판받았잖아요. 그러면 인간의 심판을 받아 십자가 졌으니까 그 사람 지옥 갑니까? 그 강도는 비록 인간의 심판은 받았지만 누구의 심판은 안 받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안 받죠. 여러분, 어느 쪽이 좋습니까? 예수님 대신 풀려난 강도가 바라바입니다. 민란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질이 나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대신 인간의 사형에서 풀려나고 하나님 심판에 걸려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면 풀려난 것이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사형제도가 있느냐 없느냐 그 문제는 의미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역사의 주체인 인간이 하는 심판이기 때문에 의미 없는 것입니다.

안식일 안 지켰다고 돌로 쳐 죽여라. 민수기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어떻게 합니까? 안식일 안 지킨 사람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 심판 옳은 심판입니까? 안 좋은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묵시적으로 하신 말씀을 인간들은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역사적 심판으로 감행해서 ‘아이구, 하나님 뜻대로 했다.’ 고 하는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이 나무에 달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저주받아 죽었다가 살아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는 해방의 코스,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교도소 안 간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에서부터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것이 남들 보기에는 역사 속에서 재판받아 죽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한테 받는 형벌로 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안 봤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죄 없는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는 어린양으로서 아버지의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이 묵시적인 사건에 같이 초청받아서 같이 합류된 자만이 천국 갑니다. 그 외는 못 갑니다.  십자가를 모르면 못 갑니다. 기도해서 교도소에서 빼 달라 그런 기도는 십자가와 관계없습니다. 몸 아픈데 건강하게 해 달라는 것은 십자가와 관계없습니다. 사업 안 되는데 잘되게 해 달라는 것도 십자가와 관계없습니다. 교회 망했는데 사람 모아 달라는 것도 십자가와 관계없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사람 앞에 죄진 게 아니고 누구한테 죄진 것입니까? 시편 51편에. 사람한테 죄진 것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께 죄졌습니다.’ 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나는 아버지께 죄지은 자다. 탕자가 그런 소리 합니다. 그 아버지는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아버지를 알 자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오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 심판 안에 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이름을 통해서 비로소 남들에게 숨겨진 아버지 앞에 서보면 내가 바로 진작 처음부터 저주받아야 합당한 자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짐승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네 개의 바람이 불어야 된다는 말은 이제는 그 짐승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이 세상의 어느 구석에 숨어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어느 구석에 숨어도! 하나님께서 ‘아이쿠, 네가 거기 숨은 줄 몰랐다.’ 그런 것 없습니다. 벌써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한쪽으로 심판받기 위해서 짐승이 나오도록 모았다 이 말은 더 이상 남겨놓은 악마는 없다는 말입니다. 남겨놓은 귀신은 없습니다. 짐승이란 짐승은 죄다 모았습니다. 그 짐승이 회오리바람 속에서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는데, 그 짐승이 짐승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바다의 짐승이 땅에 오니 한 국가의 왕이 됩니다. 국가의 왕을 바다에 집어넣으면 짐승이 됩니다. 그 짐승을 바다에서 바람으로 뽑아내면 국가의 왕이 됩니다. 우리는 그 왕의 초월적인 권력에 아무소리 못하고 ‘살려주세요.’ 하면서 그 앞에 고개 숙입니다. 모든 인간의 자아에는 ‘살려주세요.’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일 낮에도 숟가락 들 때마다 ‘살려주세요.’가 다 담겨있습니다. 그냥 행동하는 법이 없습니다. 엄마가 ‘야, 공부해.’ 공부하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엄마, 나 공부하고 있는 거야.’ 여기에 생략된 말이 있습니다. ‘엄마, 공부하고 있으니까 날 살려주세요.’ 이것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의지하게 돼 있습니다. 그것이 이 지상에서는 최고의 권력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권력은 왕이 쥐고 있습니다. 그 왕의 배후를 바람 불어서 캐내고 보니까 왕의 배후는 바다와 연결돼 있고 바다의 짐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묵시적인 주체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뭐로 만들려 했습니까? ➀번 빵 주는 자 ➁번 고기 주는 자 ➂번 임금. 몇 번입니까? 임금이잖아요. 임금 삼고자 했습니다. 바로 저런 타입의 메시아인 왕을 선호한 것입니다.

이처럼 바다의 짐승은 지상의 인간들이 고대하고 그리워하던 그 영웅의 모습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대환영을 받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이 짐승을 사람들에게 훌륭한 분이라고 소개하는 역할을 땅에 있는 짐승이 합니다. 이게 바로 거짓선지자! 거짓선지자 논리는 간단합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 있죠? 여러분들이 원하는 게 현재 눈에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가 소개하는 분은 짠! 여러분들이 그동안 학수고대했던 그분이 등장할 것입니다. 자, 나오세요. 우리의 임금이시여.’ 요 소리 하는 것입니다. 바다의 짐승이 땅에 있는 그에게 권력을 줘서 그렇게 합니다.

3절에 봅시다.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왜 넷인가? 왜 다섯은 안 되고 여섯은 안 되고 일곱은 안 되고 왜 넷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다니엘 2장에서 느부갓네살이 꿈을 꿨잖아요. 이건 누가 꿨어요? 다니엘이 꿨잖아요. 느부갓네살이 꿈을 꿨는데 그 꿈은 느부갓네살 다운 꿈입니다. 왜, 그 꿈 꾼 당사자가 지상의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짐승이 꿈을 꿀 때 어떤 꿈을 꿀까요? 강아지가 꿈꾸면 강아지 꿈꾸고 원숭이가 꿈꾸면 원숭이 꿈을 꾼다는 이야기를 누가 한 적이 있어요. 원숭이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제가 지어서 한 이야긴데, 원숭이의 하나님은 원숭이 모습이고 강아지 하나님은 강아지 모습이고, 따라서 인간의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은 자기를 투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이에르 바하 라는 철학자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짐승이 꿈을 꿨을 때 그 꿈은 짐승 속에 포함된 것이 아니고 꿈이 짐승을 지배하게 돼 있습니다. 꿈이 뭐였습니까? 금 신상입니다. 금 신상이 바로 4개로 구분돼 있습니다. 금, 은, 놋, 그 다음에 철과 철 +흙,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로 보자 이 말입니다. 왜 하나로 보느냐? 이것을 해석한 자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 또 꿈을 꿨잖아요. 다니엘이 꾼 꿈은 뭐를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무슨 대상을 놓고 거기에 대한 해석용으로 꿈을 꾼 것입니다. 여기 수직적으로 고정돼 있는 이 우상, 수직적으로 고정돼 있기 때문에 이 우상은 흔들림이 없이 그냥 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엎어지게 되면 지평에 나란히 눕게 됩니다. 이것이 토막 지어지면 그 토막, 토막 하나가 새끼 짐승으로 나옵니다. 큰 짐승 안에 새끼 짐승들이 나란히 출현됩니다. 그 사실을 해명하는 다니엘이 꾼 꿈이 느부갓네살 꿈을 해석 해버린 것입니다.

주도권은 역사의 주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의 주체를 꿈꾸게 한 묵시의 주체가 꾼 꿈이 역사의 주체보다 더 우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해석이 지상의 인간들이 율법을 해석하는 것보다 더 우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모세 해석을 다시 해버립니다. ‘모세 율법은 그런 뜻이 아니야 이런 뜻이야’ 라고 해석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백성들도 ‘야, 이런 권세는 도대체 어디서 온 권세냐?’ 이럽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공격할 때 ‘세례요한의 권세가 누구한테 왔느냐’ 묻죠? ‘하늘에서 왔느냐 사람에게서 왔느냐?’ 하늘에서 온 권세가 사람의 권세를 재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해석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 신상이 눕혀 있으니 이 신상이 분명히 하나인데 이것이 4개로 분류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 하나 분절될 수도 있고 해체될 수도 있습니다. 독수리 오형제 합체, 하면 하나로 모이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하나처럼 움직입니다. 하나처럼 움직이는 원리가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큰 성 바벨론입니다. 바벨론 하나로 합체돼 있습니다. 짐승 속의 짐승의 사슬, 연쇄 고리,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연쇄 고리를 또 잘라보면 분산된 짐승 새끼들, 그게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 안에 짐승을 키우고 있었고 우리 안에 있는 짐승이 바다에서 온 짐승을 흔쾌히 마중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내 뜻대로 제발 해줄 수 있는 어떤 영웅이 없을까?’ 입니다.

바다에서 짐승이 나오는데 기어 나옵니다.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입니다. 짐승이니까 뭐는 아니다? 사람은 아니다 이 말이죠. 조금 전 묵시에서 심판은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사람을 다 짐승으로 바꿉니다. 이러한 안목은 묵시적 안목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다니엘을 해석하면 국가 최고주의를 지향 하는 국가에서는 다니엘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책입니다. 국가가 곧 짐승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국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짐승으로 변해서 이해된다는 것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면서 국가나 왕은 짐승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이리 오너라’ 이렇게 하지 말고 ‘짐승아 이 앞에 와. 네 죄를 알렸다.’ 이렇게 하면 이미 피고는 죄인으로 전제된 상태에서 불리는 것입니다.

첫 번째 피고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이것은 바로 바벨론 나라인데 독수리 날개는 느부갓네살 왕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상당히 재밌는 말이죠? 원래 느부갓네살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인데 그동안 무슨 행세했다? 사람처럼 행세했다 이렇게 됩니다. 이것은 거꾸로입니다. 사람인데 마음이 고약해서 짐승이 됐다는 것이 아니고, ‘원래 짐승인데 지금 사람인체 행세하고 있구나.’ 이렇게 됩니다. ‘박ㅇㅇ 너 짐승이지? 아이, 사람인체 하는구나.’ 이런 것입니다. ‘저 사람 봐라, 서강대학교 나오고 영국, 프랑스 유학 갔다가 거기서 엄마 사고소식 듣고 그때부터 정수회 들어가서 관리하면서 정치 배워서 사람행세 하는구나, 신기해 죽겠다. 사람행세도 다하고.’ 이러고 있다 말입니다.

박ㅇㅇ는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훌륭한 짐승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짐승노릇을 잘 해서 모든 국민을 기쁘게 할 것이냐? 이게 앞으로 5년 남은 중임하면 10년의 과제입니다. 그래서 북한 김정은 짐승하고 싸워야 돼요. 그런데 이번 짐승은 여자 짐승입니다.

그 다음에 5절에 보면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곰이라는 것은 미련 곰탱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만큼 덩치가 큰데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이게 곰인데 메대, 바사거든요. 한편이라니까 이 곰(짐승)은 두 편으로 나눠서 이해하라는 뜻입니다. 원래 메대 나라와 바사나라가 같은 나라가 아닙니다. 바사는 페르샤인데 메대와 같은 나라가 아닙니다. 그런데 메대 바사 두 나라가 다 바벨론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 우세하냐 하면 바사나라가 한쪽이 다리를 들었다. 일본의 스모하듯이 한쪽 다리를 들잖아요. 한쪽을 드는 것이 메대보다 바사가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그 입의 이 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세 개의 갈빗대가 뭐냐 하면 페르샤 나라가 점령해야 될 3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벨론, 애굽, 리디아를 바사나라가 완전히 다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페르샤 나라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6절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러니까 앞의 첫 번째 짐승은 사자 같은데 독수리 날개 있죠? 그러나 이 짐승은 훨씬 더 빨라요. 표범이 사자보다 더 빠르잖아요. 빠른데 날개까지 있으니까 얼마나 빠릅니까? 그러니까 바사나라 다음에 나오는 나라는 재빠르게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차지하고 있던 그 영토를 통째로 잡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토는 항상 얼추 제한돼 있습니다.

처음의 짐승이 무슨 짐승입니까? 바벨론입니다. 바벨론 그 영토 중심으로 계속 그 다음에 그 영토를 누가 차지하고 또 누가 차지하고 이런 식으로 나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금 신상의 위치는 별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거기서 새끼 까는 것처럼. 금, 은, 놋, 철, 그 다음에 철 + 진흙, 그 영토에서 그대로 움직입니다.

빠르게 점령했는데 그 다음에 보면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넷이 있다는 말은 B.C. 320년경에 알랙산더가 자기는 점령하는 것만 하고 빨리 죽습니다. 그 뒤에 네 명의 장군이 있습니다. 4명의 장군이 영토를 분할해서 통치하게 됩니다. 그게 헬라나라입니다. B.C. 331년에 망하고 B.C. 301년에 입수스 전쟁이 있는데 거기서 확연하게 마지막 4개의 왕으로 갈라집니다.

4개의 왕으로 갈라졌는데 여기 이태리가 있고 그리스, 아가야, 마게도니아, 그 다음에 터키, 지중해가 있고 이렇게 사해바다가 있습니다. 여기 사우디아라비아가 있고 여기 이렇게 이란, 이라크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로마 이태리 이쪽을 차지하는 카산더(Cassander)라는 장군이 이곳을 지배했습니다. 터키를 지배하는 리시마쿠스(Lysimachus)란 장군이 그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 밑에 시리아, 페르샤, 바벨론 이 지역을 점령한 사람은 유명하고 중요한데요. 나중에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옵니다. 셀류쿠스(Seleucus)라는 장군이 여기를 차지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 프톨미 왕조(남쪽 왕)하고 셀류쿠스(북쪽 왕)왕조하고 다니엘 11장에 보면 그 내막이 어떻게 전개 되는지 나와 있습니다. 이것들이 저희끼리 싸우다가 발길질하고 발길질 할 때마다 예루살렘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격이 됩니다.

그리고 이들의 전쟁은 바람을 불어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와서 한 전쟁입니다. 바다가 뭘 점령했다? 땅을 점령한 것입니다. 땅은 원래 바다가 점령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동안 지켜줬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나라 망하고 난 뒤에 볼 짱 다 봤으니까 끝나버렸습니다. ‘자, 마지막 장면, 자, 드라마 마지막 회 들어갑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원래 막장 드라마의 마지막 회는 바빠요. 빨리 결혼도 시켜야 되지, 원수도 갚아야지, 또 회개할 건 회개도 시켜야지, 굉장히 바빠요. 속도가 되게 빨라요. 그때는 잔소리나 감격은 일단 천천히 하고, 복수 할 것은 빨리 복수해야 되잖아요. 마지막 때가 되니까 그동안 숨어있던 바다의 짐승이 땅 위를 다 도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 여기에 있는 백성들은 심정이 어떻겠어요? 지금하고 똑같습니다. 지금도 소스로 범벅됐으니까. 케이크에 크림이 하얗게 덮여 있습니다. 눈이 오면 눈에 모든 것이 덮이잖아요. 지금 짐승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 영혼을 짐승이 완전히 덮고 있으니까 그때 살아가는 사람이나 지금 살아가는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어떻게 덮여 있습니까?

‘도와주세요. 어디 힘센 사람 없습니까?’ 권력이 모이는 곳은 어디죠? 돈의 흐름이 모이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야 시장이죠. 경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놓고 보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여러 가지 관점이 서로 구분되는 서로 섞이지 않는 관점이 나옵니다. 경제적인 관점, 과학적 관점, 예술적 관점, 종교적인 관점, 정치적 관점, 전부 다 관점이 달라서 어느 관점을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어떤 사람은 그걸 예술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정치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로 정치적으로 보는 사람은 어떠냐 하면 정치인 보좌관들, 월급도 별로 없고 수입도 거의 없지만 언젠가는 한방, 국회의원 보좌관 되면 보상해 줄게. 보좌관 몇 년 하다가 국회의원 출마하면 된다. 그렇게 정치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또는 개뿔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면서 언젠가는 김기덕처럼 된다 하고 조연출이나 조명 들고 따라다니는 사람 있잖아요. 젊은 청춘을 영화에 바치는 사람들. 김기덕도 마찬가지고 홍ㅇㅇ감독도 그렇고 옛날부터 비리비리했어요. 돈도, 써주는 사람도 없고 어떤 시나리오 작가는 굶어죽었다는 소문 있잖아요. 수입이 없어서 여자하고 있는데 굶어죽었어요. 그래도 이 작품 하나 언젠가 뜰 거라 하는 그런 기대로 삽니다. 세상에서 볼 때 예술적 관점은 이렇습니다. ‘야야, 너 공장에나 다녀라’ 그런 관점은 경제적 관점입니다. 자기는 예술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런 것보다 예술적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짐승 안에서 어떻게 처신하는가, 본인이 원하는 관점을 골라서 처신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한테 버림받고 난 뒤에 보란 듯이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그 돈으로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여자를 내 것으로 다시 뺏어 오려는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돈 가진 자가 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 관점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관점이라도 그것은 바로 악마입니다. 악마의 속성입니다. 심지어 종교적 관점, 내가 교회 목사 되어 성공해서 내가 세상에서 주의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것 이것도 세상에서 하나의 관점이 됩니다. 전부 다 짐승이 분배해 준 속성들입니다.

‘이런 내가 십자가 앞에서 심판받아 마땅해.’ 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안 됩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살려내는 방식으로 살기 때문에 불가능 합니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는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건 영이다고 하십니다. 네가 성령으로 거듭 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간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런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 등록하시면 죽어서 천국 갑니다. 이런 것만 사람들은 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단체라는 아주 편리한 구원단체가 인간사회에서 필요합니다. 주의 복이 온다는 그 에이전트(agent), 복을 준다는 중개인이 필요합니다. 무당 같은 인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옛날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제가 조금 전 질문을 뭐라 했던가요? ‘이러한 왕들이 치대는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태어났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처신할 것이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뭐 종교적인 순교자 나올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빌붙어서 ‘내가 헬라로 다 바꾸겠다고 할 것입니다. 예, 내가 유대인 포기하고 헬라인 될게요. 할례도 안 할게요.’ 해서 고위 관직으로 잘 먹고 잘 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나라로 이민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그것은 바로 캄캄한 먹구름 밑에서 노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깜깜한 먹구름! 이만큼 두께가 두꺼운 먹구름이어서 어떤 것으로도 뚫고 하늘의 주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는 그런 입장에서 ‘내가 오늘도 어디 가서 사느냐.’ 그저 눈만 뜨면 ‘어떻게 살지?’ 만 생각하는 그런 자들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현실 전부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만 뜨면 ‘뭐 먹고 사느냐? 이 짓 안 하고 살 수 있는 방법 있으면 나 그 짓 하겠다.’ 돈 모아서 주식 투자해서 이 고생 안 하고 주식 투자해서 그걸로 먹고 살까? 이런 경제적 관점, 투자 적 관점, 포트폴리오 깔아서 펀드 해서 이거 안 되면 저것 되게 해서 살까? 모든 것을 그런 관점에서 한다는 것은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는 말입니다. 일기예보 볼 것도 없습니다. 매일같이 흐립니다. 흐려도 너~~무 흐립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9장에서 세상에 눈먼 장님이 그 눈을 떴다 아닙니까?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제자들도 불신자인데 세상에 제자들도 모르는 예수님에 대해서 눈먼 소경이 예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실로암 물가에서. 원래 실로암 물이라는 것은 옛날 예루살렘 경내에 있습니다. 옛날 예루살렘 성지에 기혼 샘이라고 샘물이 있습니다. 그 샘을 지하수로를 뚫어서 히스기야 때 예루살렘 안으로 끌고와 연못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실로암입니다. 진흙을 이겨서 발랐는데 이 실로암 물에 씻었더니 눈이 떴습니다.

그렇다면 이 물의 효과입니까? 아니면 진흙 때문에  눈을 떴습니까? 뭣 때문에 눈이 떴죠? 예수님께서 뜨게 하셨죠. 옛날에는 진흙 바르고 눈 뜨면 나의 행동이 나를 살리고 이 행동에 의해서 어떤 결과가 주어질 것이라고 여겼던 그런 먹구름 속의 육의 세계 속에 살던 사람이 지금 일어난 이 행동은 내가 예상도 못한 일입니다. 내가 미처 이해 안 되는 행동입니다. 지금 자기가 미친놈이 됩니다. 내가 이 짓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자기 예상 속에 없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 들어갈 때 요단강 들어가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수영복 준비하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냥 엘리사 만나서 침이나 맞고 병이나 고칠까 싶어서 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만나주지도 않고 요단강 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 보니 자신이 사는 동네 강물보다 더러워요. 그래서 이런 물 같으면 우리 동네에도 많다 했잖아요.

우리가 예상 못한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이유는 이 방법으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그것이 예수님을 진짜 믿는 것입니다. 내가 악착같이 예수 믿겠다 하는 그것은 행함입니다. 그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소경이 눈을 떴다는 말은 눈 뜨고 다닌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다고 하는 자들을 소경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키도 보고 몸무게도 보고, 예수님을 보고 있잖아요.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네가 나를 보느냐?’ ‘봅니다.’ ‘나를 보니 너는 소경이야’ 분명 보고 있는데 소경입니다. 봐도 못 봅니다. 봐도 볼 수가 없습니다.

썩은 데서 나오는 것은 먹구름 속에서의 세상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자기가 썩어빠진 사고방식으로 보니 예수님이 해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된 소경은 눈을 감아도 떠도 이제는 소경이 아닙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과학에는 소용 있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별을 관찰하고 과학을 전개 하는 데는 충분히 소용있습니다. 돈 셀 때 돈 잘 세는가 보는데 충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는데 우리 눈이 필요 없습니다. 우린 아무 쓸데없는 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 왜 우리가 눈 뜨고 있는가? 죄 지으라고 눈 뜨고 있는 것입니다. 봐도 깨닫지 못하는 눈을 뜨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예수님을 안다고 하니까 그것이 죄라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눈이 있는 것입니다. 눈이 달린 것이 문제입니다. 눈 달리고 코 달린 것이 문제입니다. 차라리 관 속에 누워서 예수 믿으면 오늘 믿든 내일 믿든 믿을 것 같은데, 펄펄 살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네 번째 짐승입니다. “네 번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이 네 번째 짐승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 그 짐승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 활동력을 보여줍니다. 그 활동 과정자체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과정자체를 보여주는데 상당히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이 짐승은 전의 다른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이 열 뿔이 바로 로마가 망하면서 생기는 나라들입니다. 로마가 망한 것은 위에서 게르만족이 와서 망했습니다. 게르만족은 훈족에게 쫓겨서 로마로 들어 왔습니다. 로마로 와서 로마제국을 부서 버립니다. 부서지면서 나라가 동로마 서로마로 쪼개지거든요. A.D. 395년부터 갈라져서 서로마는 A.D. 476년에 망하고 동로마는 A.D. 1453년에 망합니다. 동로마는 1000년 동안 버팁니다. 로마는 원래 B.C. 168년에 세워져서 서로마는 A.D.476년에 망합니다. B.C.168년에 로마가 시작됐다는 그 전의 헬라는 B.C.330년에 시작해서 B.C.168년에 망하는데, 헬라가 망하고 난 뒤 드디어 종족이 10개로 갈라집니다. 10개로 갈라지는데 독일, 프랑스, 스위스, 포르투갈, 북 아프리카, 스페인, 영국, 이태리, 이태리, 이태리, 3개 나라, 이렇게 10개로 갈라져요. 그런데 그전까지는 이태리 프랑스가 아니겠죠. 그전의 지명을 10분 쉬고 다음 시간에 이어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