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11-11 22:09
다니엘 강의 제 9 강 b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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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강의 9강 b

일그러진 지면


관리자 15-11-11 22:09
답변  
제 9강b

에스겔 38장, 39장에 곡과 마곡의 전쟁의 자리가 있다는데 존재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자리란 말은 우리가 평소에 자기 존재를 충분히 느끼는 입장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자리예요. 그것이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사는 바닥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없다.” 고 하셨습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없으면’ 우리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바닥에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으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여기 없고 저기 없어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건이라 합니다.

사건을 어떤 신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역사를 위에서 수직으로 찢어버리면 구멍이 생깁니다. 그 구멍 생기는 지점을 ‘믿음’ 이라 하고 그 내려오는 이것을 ‘사건’이라 봅니다. 사건이 이렇게 흔적을 남기는 것을 ‘사실’이라 하고 이것을 사도들은 복음 전파라고 했습니다.

쉬운 예로 깨끗한 요에 2살 먹은 애가 오줌을 쌌습니다. 분명히 어제 저녁에는 깨끗했어요. 그런데 오줌을 싸니까 거기서 지도가 생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실이며 그 사실의 흔적은 요에 있는 지도 같은 이 지점은 특별한 지점이고, 바로 사도들이 활동한 지점, 또는 교회가 발생되는 지점, 보통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불트만이라는 신학자는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이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설명이 저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구멍을 뚫어서 번졌다 이렇게 하지 말고, 구멍을 뚫어버리면 역사가 다 뚫린 게 아니고 그 밑에 새로운 세상이 지하에 구멍을 뚫고 새롭게 발생되게 되면, 위의 것은 구겨지게 됩니다. 신학자들은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만약에 신학자들처럼 해버리면 ‘당신 누구요?’ ‘저 사도입니다.’ ‘그래요? 활동하세요.’ 그럼 우리는 우리대로 활동하겠습니다. 서로 좋게 활동합시다. 당신은 종교 파트에, 우리는 정치 파트에, 아무 충돌이나 어떤 서로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보세요. 사도요한이 계시 받고 복음 전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정치꾼들이 가만 두지를 않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 것은 너희를 미워한 게 아니고 내가 미워서 세상이 미워하게끔 세상은 필히 그렇게 돌아갈 수밖에 없게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누가?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은 적극적입니다. 소극적으로 하다 보면 고생한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너희들로 하여금 힘들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조롱받도록 만들고 무시당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11,12절에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오게 되면 조용하고 고요한 인생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감을 잡아야 됩니다.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이 말을 다른 식으로 하면 ‘각오해, 각오해.’ 그런 뜻입니다. ‘세상 만만치 않아.’ 그런데 우리가 조용하다는 말은 분명히 그것은 복음을 생각 안 하고 뭔가 정치적인 타협이 결부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종교에 정치가 관여 안 하는 것은 뭔가 어떤 협상이 이루어졌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과 기독교의 차이’ 라는 책에 나옵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처음에는 정치적인 타협을 모색했고 나중에는 정치적으로 모든 나라를 점령해서 국가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국가 전체가 교회됐다가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교회국가가 됩니다. 교황이 기존의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그리고 자기 밑에 있는 모든 신자들은 백성으로 만들어서 하나의 국가 시스템으로 꾸려갑니다. 거기서 생산되는 헌금은 전부 다 획득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이 루터, 칼빈, 재세례파 이런 개혁자들이 반대하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굴 흉내 냈습니까? 그들이 공격했던 천주교와 똑같이 흉내 내서 똑같은 조직으로 또 시작합니다. 조직을 하려면 역시 돈, 모든 게 돈, 돈을 어떻게 뽑아내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 이름 팔아서 돈을 어떻게 뽑아내느냐? 거기에 온 정신을 다 팔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뽑아내는 목사는 능력 있는 목사고, 못 뽑아내는 목사는 무능한 목사입니다. 그런 식으로 천주교와 같이 가다 보니 천주교와 싸울 일이 없습니다. 복음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천주교고 개신교, 거기다 원불교까지 다 와서 민족통일협회 만들고 이제 밥그릇 싸움 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순 복음이 이단이라 하다가 순 복음이 덩치가 커지니까 기독교 신자통계 낼 때 유리하니 넣어줍니다. 그래서 기독교 통계가 확 올라갑니다. 앞으로는 신천지도 거기에 들어갈 것입니다. 어깨동무하면서 모두 형제라 할 것입니다. 통일교도 그랬었고, 뭐 같은 신인데요 뭐. 산에 올라가는 길은 각자 다르나 꼭대기에 있는 소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똑같다. 진리는 하나인데 올라가는 길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전부 다 하나의 그리스도의 신자다 이런 개념입니다.

이것은 결국 뭐와 타협했습니까? 예수님의 적이 누구냐를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재수 없어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적까지 밝혀내면서 죽으셨습니다. 유대는 종교국가 아닙니까? 거기는 우두머리 왕이 없습니다. 누가 왕이냐 하면 바로 성전을 모시고 하는 그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입니다. 임금이라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구약의 므낫세 왕 같은 경우 들어가다가 문둥병 걸렸습니다. 안 됩니다. 무섭죠.

그것을 로마제국에서는 용납을 해준 것입니다. 각자 자기종교를 갖되 로마 정치에 대해서 반항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용납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총독은 종교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질서유지차원의 역할을 합니다. 질서유지차원은 세금을 거두는 일입니다. 세금을 원활하게 뽑아내면 그 나라는 자국민의 정신체계 안에서 굴러가는 것이 됩니다. 로마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 전에 헬라-마케도니아가 그렇게 했고, 메대 바사, 바벨론이 그렇게 했습니다. 앞선 제국들의 것을 이어 받았습니다. 바벨론, 그 다음에 페르샤(바사) 그 다음에 헬라, 로마입니다. 이것이 다니엘 7장에 4마리의 짐승 아닙니까? 짐승들이 하는 행세가 전부 다 짐승짓을 합니다. 요한계시록 들어가면 그 짐승들을 해부해 보니까 새끼 짐승 나옵니다. 그게 뭐죠? 오늘날 종교 아닙니까? 종교, 교회, 절, 전부입니다. 일반신자는 모르지만 교회에서 예수님 예수님이라고 하지만 위에 올라가면 예수님 없습니다. 전부 다 정치입니다. 이번에 총회장 얼마 썼어? 얼마 들었느냐? 정치 문제 가지고 총회 대의원들이 거기 모여서 정당정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호남 파 밀어줘서 총회장 뽑자. 경상도는 양보해라. 이것이 한국 교단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이것 하고 있습니다.

정치 문제라 하는 것은 현재 교회가 갖고 있는 재정문제를 누가 관리할 것인가입니다. 건물을 수리한다 하면 어느 교회, 어느 장로가 얼마 정도의 헌금을 할 수 있는가? 대학교 총장이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재산 관리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걸 총회장들이 합니다. 아무 재산이 없으면 편할 것인데 재산이 많아 문제입니다.

짐승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말씀의 역사에 따라서, 진척에 따라서 드디어 존재로 부각이 되면서 외부에 있던 것들이 서서히 짐승으로 일그러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일그러진 모습을 드러낸다는 이것은 성경 말씀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일상은 똑같습니다. 다니엘이 이야기했다고 해서 다니엘이 이야기하고 난 뒤에 짐승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있으나 없으나 그들은 똑같이 짐승입니다. 왜냐하면 정치라 하는 것은 공동체 정신입니다. 질서유지입니다.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합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관습과 관행입니다.

심지어 교회 청년회 회칙을 만들어도 우리 선배들 무엇을 했는가를 봅니다. 그 매뉴얼 보고 합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의 관습과 관행은 그냥 된 것이 아니고, 시행착오를 거쳐서 점점 더 진리와 그리고 합리화에 가깝습니다. 이것을 잘하는 사람이 그 회사에 능력 있는 직원입니다. 능력 있는 공무원들은 바로 전임자들이 이런 일을 했을 때 어떻게 해결했고 그 해결에 대해서 법원 판결이 어떻게 나왔는가, 그것을 머릿속에 빠른 속도로 찾아서 과장한테 보고해서, 5년 전에 이런 사례가 있었는데 주민들의 이런 민원은 이렇게 해결하시면 나중에 그들이 행정소송해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딱 갖다 될 수 있는 자가 능력 있는 행정 공무원입니다. 신입은 그런 것을 할 줄 모릅니다.

외무부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이 모든 세계의 국제 법을 환히 알고 있어서 우리가 이런 쪽으로 이렇게 외국인이 오시면 이렇게 하시면 결례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외교에 합하는 예의가 됩니다. 그러면서 빨리 대처해서 외국나라한테 욕 안 얻어먹으면 그게 최고 외교관입니다. 외교관이나 공무원은 항상 보수주의입니다. 이 보수주의를 뒤엎는 자가 누구냐, 그들이 바로 개혁주의 자들입니다. 독제자들입니다. 뭘 끊습니까? 관행과 관습을 끊어버립니다. 흘러온 역사를 부정해 버리고 자기가 이 나라를 새롭게 책임지겠다는 나선 것입니다. 그럴 때 성경에서는 새로운 짐승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짐승이 나옵니다.

그래서 네 가지 짐승이 뭐냐? 새로운 짐승입니다. 역사가 끊어지고 새로운 역사를 잇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점점 더 질이 나쁜 역사가 됩니다. 처음에는 금, 그 다음에 은, 놋, 그 다음에 철, 마지막에는 철과 흙이 섞여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람 손으로 던지지 않는 돌에 의해 산산이 부셔집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돌을 던질 때 자기가 던졌죠? 그런데 다윗이 물매 돌을 던지면서 뭐라 했습니까? 이것은 나의 기술적인 싸움이 아니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그때 여호와의 이름은 어린애 다윗이란 소년의 손에 조약돌 하나 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래서 방금전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은 시대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어떻게 표현되느냐? 그 시대에 보편화돼 있는 용어나 개념들을 사용해서 그 시대에 부합하도록 그렇게 표현하십니다. 웃사란 사람이 언약궤가 흔들거리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그걸 붙잡으려고 할 때 죽었습니다. 뭐 들여다보지도 않고 붙잡으려고 할 때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 지금 어디 있습니까? 레이더스에서 인디언존스가 가져가 버렸어요? 잃어버린 성지를 찾아서 영화에 보면. 법궤 나오잖아요. 그 법궤 지금 어디 있죠? 신문에 안 나왔나요? 성경에 나왔죠. 그게 불탔죠? 언제 불탔습니까? BC586년 바벨론이 와서 성전 불태울 때 성전 껍데기만 태운 줄 압니까? 홀라당 다 태웠습니다. 심지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태웠습니다. 그거 다시 만들었습니다. 다시 만든 것을 AD 70년 경에 로마 군인 디도가 와서 홀라당 다 태웠습니다.

지금은 예루살렘 성전이 삼 분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헤롯성전이라 하는데 사실은 황금 돔은 헤롯이 지은 것이 아니고 이슬람 쪽에서 지었습니다. 돈 들여서 마호메트 후손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손도 안 댔습니다. 어쨌든 셋으로 분할되어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세 나라에 분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언젠가는 누가 먹는다? 이스라엘이 먹는 날에, 드디어 감람산에 누가 오신다?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의 전쟁은 장난이 아닙니다. 이건 유엔이고 뭐고 없습니다. 이것은 북한보다 더합니다. 이것은 유대인, 이스라엘이 구원받아야 되는 문제입니다. 정치 문제가 아니고 구원문제입니다.

팔레스타인 있잖아요? 블레셋 사람은 저주받아 합당한 족속이기 때문에 마구 조집니다. 지금 정치학적으로. 지금 블레셋 땅에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주했습니다. 누구 땅인지 판명되도록 지금 그런 정책을 이스라엘이 하고 있습니다. 원자 폭탄 많이 만들어 놓고 까불면 싸버리려고 합니다. 왜 주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한국하고 이스라엘하고 싸우면 한국이 져요. 왜, 한국은 아! 대한민국, 하고 있을 때 저들은 여호와입니다. 여호와가 이기겠습니까? 대한민국이 이기겠습니까? 김일성 김정일 북한하고 붙어도 이스라엘이 이겨요. 저들은 김일성이지만 이들은 여호와라니까요. 이게 실제입니다.

그 민족에게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아, 재수 없었다.; 이렇게 돌아가신 게 아니고, 충분하게 “너희 애비는 악마니라.” 고 밝히셨습니다. 유대인의 애비가 악마니까 독사의 새끼들입니다. 그 독사의 새끼들을 충분하게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들 속에서 주님이 심판받았습니다. 이 심판을 주님이 심판하십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 영은 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심판한 그 심판을 심판해 버립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➀ 심판을 심판한다. ➁ 종말을 심판한다. ➂ 인간의 의를 심판한다. ➃ 인간의 자비와 인간의 사랑과 구제를 누가 심판한다? 성령이 와서 심판한다. ➄ 인간의 자아를 누가 심판한다? 성령이 와서 심판한다. 왜, 십자기 지신 내용으로 때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졌다는 것은 죽음 사건입니다. 죽음 사건이면 분명히 누가 죽인 자가 있을 것 아닙니까? ‘네가 죽였잖아.’ 해서 그걸 품고 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배당 천장에 붙어있다고 십자가가 아닙니다. 현재 교회 나오는 우리가 누굴 죽인다? 예수님을 죽이는 장본인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그 모임이 바로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모임입니다.

자신이 피해자가 됨으로서 가해자를 찾아나서는 작업이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구약은 정치적인 면에서 인간적인 죄를 끄집어냅니다. 그런데 신약의 사도바울 편지에 보면 인간의 정치적인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고 인간의 어디에서? 인간의 심령, 내부 문제로 파급을 시켜놨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네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모든 인간의 마음까지 파고들어가 버렸습니다. ‘집사입니다. 장로입니다. 목사입니다.’ 이거 다 소용없습니다. ‘현재 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 맞잖아.’ 이렇게 말씀으로 꽂아버립니다. 그러니까 설교할 때는 우리 마음을 꽂아서 호소해야 됩니다. ‘우리 이렇게 교회 크게 부흥합시다.’ 이따위 소리하지 말고 정치적인 발언 하지 말고 마음을 파고들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동안 우리의 잘남 가지고 어떤 삶의 보람을 느끼려 하는 사람들은 그 무거운 존재의 무게를 놔버리게 됩니다. 그게 행복 아닙니까? 그 존재의 가벼움! 챙길 필요도 없는데 내가 나를 챙겨서 나를 구원하려는 것은 로켓 올라간다고 1단, 2단, 3단 해봐야 백날 연기만 나고 올라가도 궤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나한테 기름 주입해서 로켓 올린다고 하는데 무거워서 뜨지를 못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다.’ 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만 믿어지면 저절로 뜹니다. 헬륨가스를 집어넣어 놨습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니까 영의 힘으로 저절로 부활이 됩니다. 그런데 내 힘으로 내가 절제하고 관리하고, 온유 되지도 않는 온유 한다고 하고, 미워하는 형제를 사랑 하는 척 이렇게 억지를 부리니 본인도 괴롭고 주변사람도 더욱 더 괴롭습니다.

다단계 모임의 특징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이용할 것만 있습니다. 서로가 네가 사기 당해줘야 내가 돈이나 챙기고, 내가 사기 당하면 네가 돈 챙기고, 그게 다단계입니다. 다단계 여러분 안 해봤죠? 정수기 같은 거 안 해봤죠? 우리 형이 그거해서 돈 2천만 원 날렸습니다. 물건을 외상으로 안 줍니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사채 얻어서 돈을 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2천만 원 날렸습니다. 한 4년 됐습니다. 그래서 빚만 2천~ 3천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세상의 형제간도 돈이 없으면 형이 아닙니다. 형 값을 하려면 동생들한테 뭔가 팍팍 베푸는 게 있을 때 동생은 저절로 형을 존경합니다. 그런데 형이 짜증 소리 하면 웬수 중에 웬수가 됩니다. 차라리 저 인간 빨리 안 죽나, 이런다니까요. 그게 무슨 범사에 감사하라가 됩니까? 그러니 우리의 마음이 짐승의 마음으로 점령당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할 때 남의 이야기 인줄 알았죠? 우리는 남의 이야기로 생각했지만 주님은 꾸준하게 그 이야기를 기어이 구약 이스라엘을 경유해서 우리의 이야기로 만드십니다. 옛날 미국 드라마에 보면 딴따다다, 하면서 심지가 불타잖아요? 성경도 그것 같아요. 창세기부터 심지가 불타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죽 와서 십자가에서 그 심지가 폭발해 버립니다. 심지 타는 냄새가 막 나는 것 같잖아요. 심지에 들어가는 것이 선지자들의 고난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나와 나의 복음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핍박을 받았느니라. 그것이 복입니다. 그게 팔복 중에 제일 좋은 복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핍박을 받아줘.’ 이것이 복입니다.

우리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타들어가야 됩니다. 우리는 죄짓고 죄짓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 심지가 우리한테 심지가 타들어가고 폭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여, 내가 나쁜 놈입니다. 내가 나쁜 놈입니다.’ 할 때 우리는 배설물 날아가 버리고 우리 속에 헬륨가스가 차서 존재의 가벼움이 됩니다. ‘잠만 잘 자더라, 밥만 잘 먹더라.’ 가 아니라 잠만 잘 자도 구원받았는데 걱정할 게 뭐가 남아 있습니까? 이상해, 구원받아서 영생 받았는데 걱정할 게 뭐가 남아있습니까?

용서를 안 받았으면 착한 일해서 용서받을 일 생각하니까 잠도 못 이루지만, 이것은 착하나 안착하나 이미 용서를 받아버렸는데 무슨 걱정 있습니까? 용서해주셔야 의인이지, 내가 의인 되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나한테 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 작업, 그 포크레인 작업소리 안 들립니까? 주의 의가 누적된 작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한 일해서 그것을 의라고 내밀려고 하니까 되지도 않는 착한일을 하려고 합니다. 착한 일도 해야지, 돈도 벌어야 되지, 남도 욕해서 사기도 쳐야 되지, 이렇게 꽃다발 같은 몸이 무슨 착한 일을 합니까?

이질적인 것이 모여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짐승입니다. 이것은 연합이 아니고 결합이라 합니다. 어떤 나라가 질이 나쁘다는 것은 잘 쪼개진다는 말입니다. 짐승은 본드가 약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안 그렇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위에는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누굽니까? 다니엘이 믿던 여호와만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은 짐승이다? 아니다? 짐승이었습니다. 그 정도 돼도 짐승이라면 대충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결합해서 해바라기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이런 것은 누가 픽 하면 확 흩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섞여 있는 것, 이것은 힘써도 힘이 별로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곧장 누구한테 배신당하느냐 하면 그 밑에 있는 부하들한테 배신당합니다. 헬라-메케도니아 대단한 짐승입니다. 하지만 그 밑의 4명의 부하에 의해서 배신당합니다. 땅의 영토가 분할됩니다. 분할되어 프톨레미우스라 해서 남쪽 이집트고, 위쪽 시리아 쪽에 셀류쿠스가 있습니다. 그쪽 장군하고 이쪽 장군의 가문이 싸우는데 참 재밌죠? 한번 이렇게 싸우면서 좋다고 예루살렘 밟아버리고 지나가고, 올라가면서 기분 나쁘다고 예루살렘 밟고 지나갑니다. 프톨레미 왕조도 저쪽 셀류쿠스 왕조 친다고 예루살렘 가면서 ‘돈 내라. 같은 편이니까 돈 내라.’ 하고 저쪽도 내려오면서 기분 나쁘다고 ‘돈 내라’ 하고 예루살렘은 중간에서 고래싸움에 이래도 터지고 저래도 터집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운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또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죽어나는 건 예루살렘만 죽어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2가지 개념, 하나는 우리가 헬라를 대들자, 또 한쪽은 ‘무모하다, 차라리 말 잘 듣자’는 견해가 나옵니다. 고려 말기에 ‘원나라 편들자, 또는 안 된다. 원나라한테 이겨야 된다.’ 고 하지요. 잠시 AD 163년 경에 다윗 혈통이라고 우기는 마카비라는 사람에 의해서 잠시 독립전쟁을 하여 승리합니다. 이것을 하누파 절기라 해서 지금도 유대인 크게 즐깁니다. 그런데 잠시 승리하면서 점점 내부적인 갈등으로 나타납니다. 승리하면서 드디어 바리새인의 편을 들것이냐 사두개인 편을 드느냐의 문제로 드러납니다. 여기서부터 드디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간의 정치적인 알력이 발생됩니다.

보세요. 짐승이 외부 짐승을 이기기 위해서 여호와, 다윗, 하나님 말씀을 의지했잖아요? 의지했던 그들이 나중에 내부적인 갈등이 나타나고 보니까 결국 그 바깥에 있는 짐승이 무슨 짐승으로 정리됐어요? 짐승인 유대나라를 이긴 짐승으로 새롭게 등극된 것입니다.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교회에서 원로 목사가 너무 오래된 목사가 돼서 설교를 못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 못합니다. 나가주세요.’ 하니까 목사가 머리 써서 ‘내가 원로목사 은퇴하려면 3년 남았으니까 3년간 미안해도 그 대신 설교 많은 부분을 내가 설교 잘하는 목사를 세우겠다. 그러면 교회가 평화롭고 그러면 처음 오는 교인도 다른 교회에 안 빼앗기니까 그렇게 하자.’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조용할 것 같은데 갑자기 외부적으로 신천지나 이단이 등장합니다. 그때 목사가 머리를 써서 이때다 해서 내부적인 그런 갈등을 외부적인 사건을 빌미삼아서 내부적인 결속과 단결을 취하게 됩니다. 그러면 교인들 입에서 ‘우리 목사 나가라.’ 하는 소리가 쑥 들어갑니다. 총회 법에 의해서 공동의회 3분의 2만 동의 받으면 되니 그런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이단)들은 물러가고 난 뒤에 다시 자기는 평화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교 잘하는 그 부목사가 교회 5백 명 중에서 자기편이 4백 명 되고 원로목사는 백 명일 때 원로 목사가 머리를 씁니다. 자기편이 적거든요. 좋은 말로 합니다. ‘야, 다른 큰 교회 소개시켜 줄까?’ 그러면서 부목사에게 자꾸 나가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부목사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부목사의 인기가 높아지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이 현실적입니다. 사울이 자꾸 다윗을 밀어냅니다.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 했으니까. 10배입니다. 이것은 용서가 안 됩니다. 좋은 말로 처음에는 나가라 합니다. 나가라 하면 부교역자가 원래 존경받는 이유가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오직 복음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 가는 게 중요하지 교회는 안 중요합니다.’ 이런 이야기해서 ‘원로 목사는 못됐다. 원로 목사는 입만 열면 돈 이야기 하는데, 돈이 아니고 복음만이다. 이게 진짜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목사는 그것을 빌미로 해서 은근히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복음을 쳐 발라서 그 교회를 자기 교회로 만들려 하는 게 있었습니다. 원로 목사는 능숙해서 그걸 눈치 채서 나가라 하니까 부목사가 하는 말이 ‘목사님 그럼 투표 합시다.’ 이렇게 나왔다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시오’ 하다가 갑자기 자기 입에서 뭐가 나왔다? ‘투표 합시다.’ 이렇게 나오니까 그걸 눈치 채고 또 일단의 사람들이 갈라져서 ‘봐라, 투표합시다, 나오는 걸 보니까 진짜 복음 아니잖아, 복음을 빙자한 똑같은 인간 아닌가, 아니다, 이 고비만 지나면 그 사람이 와서 이 교회는 복음대로 할 것이다. 그러니까 모른 척하면 한국교회는 우리교회 중심으로 해서 새롭게 부흥의 불길이 일어날 거다.’ 이렇게 또 표가 갈라집니다. 이것이 짐승입니다.

결론 내립니다. 모든 인간은 짐승입니다. 저쪽이 너무 악하기 때문에 마치 내가 상대적으로 되게 천사처럼 보이지만, 적들이 물러가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내가 오야붕을 해야 됩니다. 나한테 누가 간섭하고 나한테 어떤 견제하는 세력이 있으면 밤에 잠을 못잡니다. 우리 교회 다 좋아하는데 저 집사님이 내 설교 하는 걸 삐딱하게 봐, 새벽기도 빡세게 했는데 기도발도 안 먹히는 모양이라, 한 달째 하는데 변화가 없네. 뭐 어떻게 집사한테 장로가 훈수를 해볼까, 아니면 신방을 특별히 두 배나 해볼까? 나의 것, 소유 욕, 이건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갈라디아서 보면 뭡니까? 육의 열매입니다. 육의 열매인데 복음을 전하니까 ‘그것들 전부 다 그냥 못 본체 그냥 넘어가 줘’ 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 전하는데 내가 헛짓 하는 게 아니고 내가 복음 전하기 위해서는 그냥 눈 감고 넘어가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는 목사는 그렇게 나오면 안 되고, ‘나, 내 것이 아닌데요.’ 이렇게 나와야죠. 그래야 자기에게 헬륨가스가 들은 것이 됩니다. 뭔가 내 것이 있으면 내 것이 내 우상이 되고, 그것이 자기를 짐승 만듭니다.

그러면 몸통은 사자인데 날개는 독수리다. 서로 결합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 한 몸둥아리에 같이 있어 버리면 이것은 결국 갈라집니다. 짐승이라 하는 것은 속이 텅텅 비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짐승인체, 강한 체, 척, 강한 척, 협박하는, 없으면서 있는 척하면서 협박들을 해온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주님 앞에 옵니다. 주님 앞에 심판받게 되면 전부 다 헛 껍데기입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은 사람은 따로 구원되는 것이지, 누가 자기 가진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기름 비유 나오죠?  기름 비유할 때 열 처녀 비유 나오잖아요? 여러분들이 얼마나 잘 아는지 한번 물어볼게요. 열 처녀 가운데 안 잔 처녀는 몇 명입니까? 다 잤잖아요. 왜 그걸 몰라요? 다 잤어요. 주무세요. 밭 갈 때 구원받는 사람이 밭 안 갈고 주님 기다리면서 기도했다는 것이 있습니까? 두 사람이 같이 밭을 갈았어요. 같이 밭을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뒀잖아요. 에녹이 올라갈 때 준비했습니까? 준비한 것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탕자입니다. 탕자기 때문에 탕자 값 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탕자 아닌 척하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 있으면 그것이 바로 교회고,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주님만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받을 게 없습니다. 어떤 짓도 용서받았으면 다 받은 것입니다. 축복은 전부 다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받아버렸으니. 하나님의 의가 움직이는 하나의 현장이 되고 말았으니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면 없다는 말은 뭔 뜻이냐? 모두가 뭐가 되었다? 짐승 아래 있다. 누구도? 유대나라도. 예레미야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도 그들 속에 있었습니다. 다만 다니엘에게 뭐가 주어졌다? 가브리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되니까 다니엘은 70년 돼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게 70년이 아니었어요. 70년은 기존의 옛날에 있던 역사적 지평에의 70년입니다. 앞서 곱하기 이야기했죠? 선상에서 70년이었는데 이게 면적이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습니다. 70이레가 될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 유대 땅으로 돌아가 봐야 깨지는구나.

70년은 깨지지 않잖아요? 그런데 70이레는 세 토막 납니다. 7이레, 62이레, 1이레. 이렇게 깨어져요. 깨지면 절개 면이 나오겠죠. 그 절개 면이 중요합니다. 두부 자르면 절개 면 나오잖아요. 절개 면에 뭐가 묻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의 한평생이 거기 담겨 있습니다. 주님이 잉태하시고 성장하시고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그 단면들이 70이레의 그 단면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 핍박 받아서 다 깨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프톨레미 왕조가 올라갈 때, 셀류쿠스 왕조가 밀고 내려 올 때 다 깨지는 것입니다. 깨지면서 세 번째로 십자가 죽으심으로서 드디어 그 1이레 때는 제사로 말미암아 영원히 뭐를 얻는다? 거룩함을 얻습니다. 그 거룩함을 얻는 그 예수님의 생애가 70이레라는 그 안에 포함돼 있습니다. 70이레는 인류 전체 역사,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가 1이레라는 의미 속에 다 포함돼 있습니다.

절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시간이 끊어진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70이레는 단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칼을 갖고 이레라는 시간개념을 잘라내는가? 그것은 예수님만이 할 수 있지, 인간은 못합니다.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뭐라 했습니까?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서 크다 했죠? 그런데 그 뒤에 무슨 말씀 있습니까?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아이라도 저보다 더 크다 했습니다. 보세요. 절개 면이 있잖아요. 세례요한이 크면 그보다 더 크다가 선지자 쪽으로 와야 되는데 이 노선이 구약 노선을 어디서 멈추느냐 하면 예수님에서 끝나버립니다. 예수님에서 새로 시작해야 됩니다. 새로 시작하는 것은 저쪽 구약에서 흘러 온 어떤 사람보다도 더 큰 자가 됩니다. 심지어 어린아이라도. 어린아이가 알긴 뭘 알겠습니까? 하지만 어린아이라도 저쪽보다 더 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간의 질을 주님 선에서 결정 내는 것입니다. 그냥 주님 선에서 결정이라 하지 말고 주님의 행하심, 주님이 이 땅에서 이루어내심, 그것이 바로 그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고 예수님이 천국에 있다면 그냥 맨숭맨숭 십자가 보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통로가 있습니다. 그 통로에서 예수님이 살았던 경로를 경유하면서 우리는 갑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과 핍박과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이 경로! 이것이 하나의 중간 통이라면 통 속으로 경유하는 것입니다. 통 속으로 경유하면 우리 바깥 천장에 뭐가 보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고난 받음과 피가 보입니다. 우리는 그 핏 속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혈관이고 우리는 거기 하나의 적혈구 같은 입장입니다.

거기 미리 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12제자, 물론 가룟유다는 빠집니다. 12제자가 갔는데 12제자가 가면서 얼마나 불평들을 했습니까? 심지어 마지막 대목에서는 ‘나 저 남자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잖아요. 심지어 자기 엄마 마리아도 예수님을 이해 못했잖아요. ‘여자여,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이렇게 욕까지 얻어먹었는지는 모르지만 얻어먹고. ‘요한아, 저 여인을 부탁한다.’ 엄마를 부탁했습니다. 얼마나 불평들을 했는지,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보고 다녔을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인간이 갖고 있던 본래의 죄를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12제자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중에 가룟유다와 바리새인들은 뭡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을 택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선택했다는 이 솜씨 앞에서 우리의 어떤 행함도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속에 우리 가스를 집어넣지 말고, 주님의 성령의 가스를 집어넣게 되면 우리에게 모든 것이 공짜가 됩니다.

그런데 그 공짜는 값이 없는 공짜가 아니고 대신 값을 치렀던 공짜입니다. 세상에 값없는 공짜는 없습니다. 주께서 대신 치렀다는 것들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의 증인이 아니고, 누구의 증인이 된다?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전 예를 이야기해봅시다. 교회에서 그런 문제 있다. 벌써 교회 편이 갈라져서 원로 목사 추대하여 기존대로 하느냐, 새 목사를 추대하느냐, 말이 많을 때 만약에 그 안에 복음을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어떻게 대체했으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돼요. ‘그거 아무 소용없는 기라’ 이러면 됩니다. ‘누가 와도 마찬가지니까 목사 바라보지 말고 우리는 복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기라. 아무 소용없는 기라. 백 명이 와도 교회 키워도 소용없는 기라. 작아도 아무 일 없는 기라.’ 이렇게 살아가게 되면 주변에 있는 집사들이 핍박을 하게 됩니다. 말이 안 통한다. 말이 안 통해.

그러나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느냐, 자존심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 쪽을 믿을 때 내가 믿는 쪽에서 실패했을 경우에 자기가 같이 실패한 걸로 그렇게 말려드는 이 어리석음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 허술함, 이게 연약한 우리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참, 이 마음 언제 성령 충만해서 초월했으면 좋겠는데.

4가지 짐승, 7장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4가지 짐승에 있는 백성들은 짐승입니까? 짐승 아닙니까? 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4가지 짐승에 속했던 사람들은 짐승입니까? 짐승 아닙니까? 짐승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마에, 또는 손에 인이 없으면 사지도 팔지도 못합니다. 여기에 모든 사람이 다 복종합니다. 단 특이 현상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 짐승의 말을 안 듣습니다.

그러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드러내려면 필히 우리는 어느 나라에 살아야 됩니까? 짐승의 나라의 굴을 통과해야 됩니다. 예수님처럼 통과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한테 남은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왜 이 나라가 짐승의 나라인지 말씀을 통해서 파악하면 우리 할 일 끝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살면서 처나 자식이 원수가 되는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왜 교회가 짐승의 나라인지, 그리고 그 중에 나도 거기에 편승하고 동조하는 나도 매일같이 짐승으로 살 수밖에 없는지, 이 말씀은 그때 헬라 시대 때 헬라 백성을 욕할 입장이 못 되고, 로마 시대 때 로마 사람들 욕할 입장이 못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그냥 방치해두면 사도바울도 짐승 돼 버립니다. 성령께서 날마다 죽이시고 날마다 살려내시니까 날마다 우리를 죽음에 넘기우고 날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나니까 사도바울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맘껏 자기의 소원대로 살다가 자기 소원대로 참수 당해서 죽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소원이 뭐겠습니까? 남의 나라 그만 살고 싶다 이 말 아닙니까?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너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주님이 속한 나라에 가는 것이 사도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백성들 때문에, 자기 할 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대로 지금 갈 수 없습니다. 참 위로의 말 같습니다마는 우리 마음대로 이 땅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악착같이 살아야 됩니다. 악착같이 아프면 링거 맞고 아프면 호스 꽂든가 해서 살아서 죽을 때까지 이 세상이 짐승이며, 나는 그 짐승을 너무너무 좋아했다는 것, 그 짐승에서 성공하기를 너무너무 기대했다는 것, 그 사실을, 그런데 그런 죄인을 죄인 되게 만들어 내시면서 그 죄인을 의인 되게 만드는 그 작업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자기 영광 받기 위해서 죄인 하나를, 우리를 뽑아서 실험실의 청개구리처럼 사용합니다. 이리 째다가 저리 째다가 너 판사 해 해서 한 번 째 보고, 판사 해야 죄가 나오니까 그렇습니다. 목사 해, 목사 해야 죄가 나오고, 너는 의사 해, 의사해야 죄 나오고, 이런 식으로 각자 자기 역할 하면서 우리를 지금도 해부하시면서 ‘요런 게 들어있으니까 내가 죽어야 했잖아.’ 하고 계속 통과하면서 일러주는 그것이 바깥사람들 보기에는 오직 예수님만 드러납니다. 내 의가 하나의 똥이고 다 더러운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만 고상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날 살렸다는, 능력이 된다는 것을 증거 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짐승을 다루면서 우리 자신부터 이 세상에 푹 젖어 산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짐승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다 같이 짐승인데 어째서 우리를 따로 뽑아내는지, 그 뽑아내는 그 근거는 뭐며, 뽑아내는 그 이유는 뭐며, 목적은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