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10-22 13:57
다니엘 강의 제 9 강 a 일그러진 지면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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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강의 제 9 강 a 일그러진 지면

관리자 15-10-22 13:57
답변  
제 9강a

다니엘 6장 19절입니다. 임금이 진짜 다니엘을 만나는 지점은 우리가 보통 사람 만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사람 만날 때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을 만날 때는 다릅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 만나는 것처럼 만나버리면 보통 사람 만나는 것과 똑같습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키가 몇 센티미터라는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몸무게는 몇 킬로그램이고 예수님이 다이어트는 하셨는가? 예수님의 동생은 몇 명이지? 예수님의 어머니는 미인일까? 그것 아무 의미 없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지가 베들레헴이냐 나사렛이냐, 그것도 의미 없습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만날 때 그냥 평소 만나는 것처럼 만나버리면 그냥 자기 신하 만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서로 이질적인 것이 만날 때는 그 만나는 장소가 중요합니다. 그 장소가 무슨 장소냐에 따라서 다니엘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됩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다니엘을 몰랐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가자마자 죽을 거야. 아이쿠, 인생 저래 살다 끝나는구나, 내가 생각해도 안 됐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자들이 다니엘은 보통 사람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다니엘은 우리가 흔히 시장 통에서 만나는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조성해 놓고 그 다음에 다니엘과 다리오 왕이 만납니다. 그럴 때 다리오 왕은 단순히 다니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다니엘이 믿었던 그 숨어있던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날 성도란 그런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 적인 것 내놓고 누가 똑똑하고 누가 잘났나? 그것 비교하라고 성도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너는 한 달 수입이 얼마? 나는 얼마다.’ 어느 대학 나오고 이런 것 따지라고 성도된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특수한 존재입니다. 그 특수한 존재를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특수한 상황과 사건을 이렇게 구성 합니다. 구성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통해서 숨어있던 주님의 활동을 그들이 새롭게 접선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를 도구로 사용을 하십니다.

쉬운 예를 들면 예수님의 12제자들이 갔던 길, 스데반 집사, 사도바울이 갔던 그 길은 보통 사람들이 자기가 가고자 해서 갈 길이 아닙니다. 이는 본인이 갈 수가 없습니다. 12제자 말고 사도바울 같은 경우를 보면 그 사람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불교 신자 아닙니다. 누굴 믿었어요?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8절에 내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의로움과 모든 것을 나는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에 누가 흠이 없나 시합 하면 그 누구한테도 기죽지 않고 누구한테 밀리지 않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요즘 개혁주의 같으면 뭐에 탁월한 사람입니까? 성화 되는데, 거룩한 생활하는데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교회 와서 도 닦는 것이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습니다. 기도면 기도, 헌금이면 헌금, 열성이면 열성, 얼마나 열성이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겠습니까?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았는데 그 모든 것이 뭐였다? 배설물! 똥, 오줌이었다.

원래 배설물은 어디서 생산됩니까? 누가 생산한 것입니까? 바로 자기가 생산한 것입니다.
그러면 나에 의해서 나왔던 것이 똥, 오줌이라면 그럼 나는 도대체 뭐예요? 그거 만들어 내는 공장입니다. 잘난 체 하는 공장, 자기 의 생산하는 공장, 남한테 기죽지 않고 남 앞에 당당하고 싶어서 인생을 살아가는 기계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갔던 사도바울은 우리 대신 미리 그 길을 가놓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그 상대방이 예수님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도대체 누구야? 누구로 인하여 저 사람이 갑자기 자기가 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느냐? 누구 계세요?’ 아무리 찾아 봐도 안 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안 보이십니다. 안 보이지만 예수님이 다루고 예수님이 관리하고 예수님이 인도하는 사람들의 완전히 독특한 면을 통해서 그들이 자신과 살아가는 인생과 대조하게 만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방금 제가 대조라는 말을 썼죠? 이것을 다른 말로 대립이라 합시다. 하나님이 어디 나타나느냐? 대립되는 두 개의 지층이 만남으로 나타납니다. 마주침! 대립해서 마주치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마주쳐서 대화해 보니까 한쪽은 복음이고 한쪽은 비 복음이고, 마주쳐야 자기 색깔이 딱 나타납니다. 둘이 마주칠 때 내 노선과 저쪽 노선이 서로 다른 철로, 다른 기차노선이라는 것이 밝혀질 게 아닙니까? 바로 그 틈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주님의 활동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빌립 집사가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났습니다. 이것은 마주침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고관인데 빌립집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한테 배웁니까? ‘아저씨, 이사야 53장에 여호와 증인이라는 사람이 누굽니까?’ 이사야 53장 펴놓고 묻습니다. 빌립 집사님이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이야기할 때 둘은 분명히 반대, 이질적이라고 여겼는데 복음을 만나니까 같은 형제가 돼 버린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보이지 않는 분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활동은 하십니다. 그 활동하는 모든 특징과 모습은 이건 얼토당토한 사람, 저 멀리 있는 사람, 이건 도저히 서로 의견이 일치될 수가 없다고 여겼던 그 모든 사회적인 장벽과 계급적인 장벽을 뛰어넘고 허물어 버리고 복음에서 형제로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빌립집사가 내시를 이용해 먹었습니까? 없습니다. 그냥 성령께서 만나게 하셔서 ‘형제 우리 집에 가서 삽시다.’ 이런 것도 없이 그냥 너는 너 갈길 가고, 나는 내 갈길 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모였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고, 성도가 있는 곳이 곧 교회입니다. 성도 모여서 교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성도가 있는 곳이 교회가 됩니다. 주님이 함께 있으니까 교회가 됩니다.

다니엘서가 어려운 이유가 그냥 다니엘을 해석하면 해석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남들이 따라오지 못할 자리에다 집어넣어 버립니다. 여기서 먼저 질문하나 던지겠습니다. 다니엘로 하여금 다니엘 되게 한 것이 다니엘의 신앙 때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다니엘을 그렇게 만든 그 자리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그 자리죠. 그런데 더 질문합니다. 그 자리는 다니엘이 미리 예상 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우발적으로 만드신 것입니까? 그 자리는 우발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평소에 다니엘이 사자 굴에 못 들어가서 환장한 분이 아닙니다. ‘아, 동물원에 가서 사자한테 먹혀서 죽어버릴까?’ 이렇게 손꼽아 간절히 기도하고 그런 거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자리는 내가 예상한 자리가 아니고 주님께서 이렇게 깔아놓으신 자리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발자국 하나 떼면 기존의 발판 날아가고 새로운 발판이 와서 발이 딱 닿게 만들고 또 떼게 되면 어디서 날아와서 닿게 만듭니다. 항상 우리로 하여금 좁은 길, 영생이 있는 길,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길로 주께서 그렇게 인도 하십니다. 우리가 ‘저쪽이 좁을 길 같아, 좁을 길로 내가 선택해서 가겠어.’ 이렇게 가게 되면 그 좁은 길이 어느새 좁은 길이 아니고, 자기 배설물을 옹호하는 자기 잘남을 자랑하는 자기가 신이 되는 자리가 돼 버립니다. 그 길은 천국 가는 길 아닙니다. 그래서 주께서 인도해야 됩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 보이도록 예수님께서 이끄셔야 구원받습니다. 예수님만 보입니다.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렇게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바로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다니엘은 그냥 당했을 뿐입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라 해서 들어갔었고, 그래서 살려고 ‘살려주세요.’ 빌지도 안 했는데 사자들이 알아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여기 22절에 보면 누가 사자의 입을 다물게 했습니까? 천사입니다.

그럼 한번 정리해 봅시다. 다니엘의 자리는 누가 관리한다? 다니엘이 관리한다? 천사가 관리한다? 천사가 관리합니다. 이 이야기를 좀 더 이어봅시다. 우리 성도가 가는 길은 우리가 관리한다? 천사가 관리한다? 천사 +성령님이 관리하십니다. 우리 신약 성경에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베드로가 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 없습니다. 베드로는 그냥 잠만 잤을 뿐입니다. 그런데 잠 잘 자고 있는 사람 깨우면 기분 나쁘잖아요. 천사가 와서 깨웠습니다. 차꼬는 ‘내가 풀어 줄게.’ 해서 풀어줬습니다. 옆에 간수들 다 잠재워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대목을 보면서 다시 시편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세상에 잠자는 것도 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불면증 환자에게 물어 보세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하다가 밤 다 새 버리고 안 됩니다. 평소에 우리가 잠 잘 때는 은혜인 줄 모르고 꼭 잠 안 올 때만 ‘은혜를 주옵소서.’ 이러고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 자리를 우리보다 더 신경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사입니다. 천사라 할 때는 여러분들은 항상 마음속으로 스가랴를 생각해야 됩니다. 이 천사가 하나님의 구약역사에 따라서, 언약의 발전에 따라서 천사가 하는 기능의 질이 변신됩니다. 스가랴에서의 천사의 기능은 한 마디로 사람을 도와주는 기능이 아니고, 사람을 배제하고 전적으로 홀로 담당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스가랴의 천사는 이 세상을 네모진 것으로 도형을 그려놓고 그 도형의 동서 남북, 사람의 발이 미치지 않고 사람의 의식이 미치지 않는 끝에 먼저 가 있습니다. 천사가 먼저 가 있습니다. 시편139편 9절 이하에 나온 말씀대로 한다면 “바다 끝에 가도 거기 계시고 하늘 끝에 가도 거기 계시고.” ‘설마 이곳에도 주님께서 역사할까?’ 라고 우리가 그렇게 조마조마 하는 그 속에도 이미 천사가 와 있습니다.

분명 ‘나는 모든 결정을 내가 해야 되고 이 세상은 나밖에 없어.’ 라고 생각했던 그 외로운 현장을 주께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체험하지 못했던 후견자, 도와주는 분이 너보다 앞서서 너의 인생길을 이끌고, 앞서서 포장공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보여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그 짧은 순간 예수님의 공로만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 배려해 주는 것이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영광받기 위한 방법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어서 우리 잘난 걸 전부 다 벗겨냅니다. 목욕탕에서 등의 때 벗겨내듯이, 우리를 아주 갈아버립니다. 우리에게 묻어 있는 모든 것, 우리 자랑, 우리 배설물을 다 떨어내 버리고, ‘아, 어찌 할꼬, 나 끝났어. 끝났어. 끝났어, 나 죽었어.’라고 하는 거기서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일이 주님 보시기에 잘 풀리고 있습니다. 정말 만사가 너무너무 잘 풀리고 있습니다. 눈이 와서 차가 굴러가는 것도 잘 풀렸고, 모든 게 잘 풀렸습니다. 그런데 그 잘 풀리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감사하지 못하고 고마워하지 못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에 뭐라고 합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매일같이 지킬 위인은 없습니다. 감사할 만한 일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일에 감사를 24시간 어디서든지 늘 지키는 사람, 마음가짐이 늘 감사한 사람, 아이큐가 50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항상 그 “범사에 감사하라.” 는 그 말씀 한 마디 앞에서 늘 죄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짜증낼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일은 지금 잘 풀리고 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는데 우리가 짜증을 낸다는 것은 아직도 배설물 같은 것들이 더덕더덕 우리 몸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자기의 꿈, 자기의 희망, 자기의 기대하는 것 때문에 짜증냅니다.

충돌, 마주침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모든 마주침은 주님의 고대하심과 기대하심과, 우리의 고대한 바가 불꽃을 튀면서 충돌해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뭐든지 고대하지 맙시다. 아예 기대하지 맙시다. 기대하면 이것이 말썽을 일으킵니다. ‘하나님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면 반드시 그것이 결국은 우리에게 실망과 분노와 주의 대한 욕설과 짜증이라는 결과물로 나와 버립니다. 아예 기대 안 하고 살면 참 좋겠는데. 그럼 기대 안 하고 살면 뭐하고 사느냐? 좀 전에 했잖아요? 범사에 감사하며 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할 이유가 있을 경우에만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면 되도 않는 방법으로 그 말씀 지킨다고 감사할 것을 찾습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감사할 게 있어야 감사하죠. 꼭 부흥회 때 죄 지은 것 회개하라 하면 죄 지은 것 아무것도 없는데 억지로 끄집어내듯이 감사할 게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감사할 게 없는 인간을 감사하게끔 자리를 만듭니다. 그 자리가 감사 안 하는 인간이 짧은 순간이나마 1초 2초 순간이나마 ‘감사합니다.’ 라는 소리가 나오도록 그렇게 주님께서 도로포장 해가면서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 마지막 길에 주님께서 마중하고 있는데 마지막 들어간 세계를 보면 이건 범사가 아니라 범사에 영원토록 감사합니다. 그 천국은 영원토록 감사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감사할 것을 미리 당겨서 감사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하면 만약 천국이 황금보석이 있어 감사하다면 황금보석이 처음에는 좋습니다. 그러나 집에 황금보석이 너무 많으면 별로 감사가 안 됩니다. 나중에 지루합니다. 그걸 경제에선 욕망 체감의 법칙이라 합니다. 처음에 맛있다 하던 것도 두 번째 먹으면 맛있습니까? 맛없어요. 그래서 부부간에 인물 보고 결혼하지 말라 하지 않습니까? 인물 보고 결혼해도 인물을 자꾸 보면 한 3개월, 6개월 가면 그 낯짝이 그 낯짝이고, 인물이 좋아도 방귀나 픽픽 뀌고 발에 냄새나고 매력이 없어집니다.

진짜 부부사이 좋은 사람은 창조됩니다. 저 양반이 저런 구석도 있었나? 이런 소리해서 죄송한데 그렇지 않은 부부한테는 지금 욕을 부르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진짜 사이좋은 부부는 자꾸 나옵니다. 뭔가 신선한 것이 계속해서 자꾸 나옵니다. 그런데 남들보고 신선하다 하면 남들이 비웃어요. ‘너 한 달 전에 그 이야기 했어.’ 한 달 전에 했어도 한 달 후에 또 해도 다시 신선해. 어떤 조건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조건이 신선한 조건이고 참신한 조건이 있어서 그걸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고 계속 신선한 것은 상대방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런 것입니다. 물론 불신자 남편보고 절대로 이런 소리 안 합니다. 불신자하고 하지 마세요. 이런 소리 하면 이용당합니다. 같은 복음을 바라보는 신자에게만 하세요.

신자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가 원하는 자리를 뭐로 바꿔줍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가까이 자리로 늘 방석을 바꿔줍니다. 십자가 가까이 가보니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범사에 감사할 것밖에 없는 요소가 됩니다. 전에는 놓쳐버린 감사거리가 지금은 새롭게 감격스러움으로 다가온다 는 이 말이죠. 이렇게들 사십니까?

원인은 남한테 있는 게 아닙니다. ‘사자야, 제발 나 성도니까 물지 마라.’ 사자한테 부탁해도 소용없습니다. 천사가 사자의 입을 다물게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사자한테 부탁해서 사자가 ‘나 고기 안 먹을게.’ 이렇게는 흥정이 안 되잖아요. 우리 자신이 사자 굴에 갔다. ‘아이구, 이제 그만 살라고 하는가 보다. 그래 살고자 하는 게 문제였었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관 속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 관속에 들어가면 관 속을 들여다보는 아내 얼굴이 아름답게 보인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지금 죽어도 마땅하다는 걸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보입니다. 십자가에 죽는 자리를 자꾸 방석을 바꿔주니까 범사에 감사하니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어려운 것 해봅시다. 에스겔 38장~39장에 곡과 마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곡과 마곡이라 해서 지금 그 동네 가봐야 별 볼일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나 미국의 복음주의 계통의 순 복음이나 침례교회 그쪽에서는 현재 이 장소를 유념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이 여기서 벌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마겟돈 전쟁이 벌어지고 승리하시게 되면 감람산에 예수님 재림하신다고 성경에서 그 지명을 그대로 이야기하니까 교인들이 ‘야, 그 성경해석 되게 쉽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 구원받기 위해서 준비하기가 굉장히 쉽죠?

요한복음 6장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영생하는 양식을 줍니까?” 라고 할 때 사람들은 먹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그걸 제안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내가 먹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 그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까?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자, 그렇게 했으면 그 다음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 하면 곤란합니다. 그 뒤 44절 말씀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오지 못한다.” 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구태여 할 필요가 있을까요?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만약 이 이야기를 안 하셨다면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했기 때문에  누구라도 ‘저 믿을게요. 믿을게요.’ 다 손들고 이렇게 나올 것이 뻔합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이 내가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의 일부로 포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쉽다 이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 영생 얻는 양식을 얻으니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쉬워서 기뻐하는 그 분위기를 그대로 가주는 것이 예수님도 좋고 우리도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는 말을 구태여 집어 넣어버립니다. 이 말을 집어넣으니 사람들이 가버린 것입니다. 왜 전도 분위기 다 버려놓습니까? 주님이 그 이야기만 안 했으면 많은 사람들이 계속 따라올 수 있습니다. ‘나 예수 또 믿어야지, 또 믿어야지.’ 하고 계속 올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체험이 될 때만 의미 있게, 진정성 있게 나한테 저장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거울보고 ‘나는 예수 믿는다.’ 고 할 때 내가 예수 믿는다 하는 것이 보이니까 내가 믿는 것 맞습니다. 이것은 체험이 됩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 내가 교회 갔다. 이것도 믿음의 일종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도 믿음의 일종, 전도, 헌금 모두다 나한테 믿음의 일종으로 나한테 수집이 되고 저장이 됩니다. 이런 것은 체험될 수 있는 믿음이라고 우리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는 말씀에서 우리가 아버지 입장을 체험될 수 없습니다. 체험될 수 없기 때문에 그건 믿을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씀 가운데 믿을 것만 골라 믿고, 안 믿는 것은 보류하고 이렇게 할까요?

미더덕 찜을 먹을 때 어떤 사람은 떡 볶기 골라먹는 사람이 있고 콩나물 골라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음식 먹을 때는 어떤 일부를 만져도 전부를 만진 것이고, 일부를 맛봐도 전부를 맛본 게 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율법을 하나 지키면 덩달아 다 지킨 것이 됩니까?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했죠? 반대로 이야기해볼게요. 율법의 모든 걸 지키다가 하나를 어겨도 다 못 지킨 것이 됩니다. 왜 야고보가 구태여 그렇게 부정적인 언사를 써가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가요?

사람들이 평소에 성경을 지킬 때 하나만 지켜도 나머지는 보류해 놓으면 언젠가는 지킬 수 있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양적 개념으로 성경말씀의 영토를 점령해나가는 식입니다. 1년 믿었으면 요만큼 지키고 2년 있으면 2학년이니까 더 지키고, 3년 하면 더 지키고 그게 성화되어서 거룩에 거룩으로 점점 더 주의 말씀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본받아 가는 모습이라고 그렇게 생각들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을 포기 못하기 때문입니까? 그동안 지킨 것이 아까워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것들을 뭐라 했습니까? 똥, 오줌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못 한 것 다 하셨다는 그 사실을 믿은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 외는 구원방법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흥정할 대상이 아닙니다. ‘주님, 이만큼 지켰으니까 요만큼 못 지켜도 보너스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보상을 기대하고 상급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인간과 인간들이나 우상을 상대할 때는 그렇게 상대하세요. 그러나 주님과는 이렇게 성립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이 말은 너희들이 ‘나를 믿으려고 하지 마. 그것도 일종의 행함이다. 진짜 믿음은 나중에 성령이 와서 주신다. 그 성령이 와서 주는 믿음에는 내가 주를 믿은 게 아니고, 주께서 나를 예수님한테 붙여준 그 관계가 믿음입니다.’ 라는 고백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열매까지 주님께서 손수 나서서 그런 자리를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앞장세워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우리가 죄인인데 우리가 의인 되어야 하나님께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 쪽에서 출발해서 그렇게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을 의인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자기 행위, 하나님의 자기 행위가 의롭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으로서 거기에 가담돼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나오죠?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함으로써 자기도 의롭고 믿는 자도 의롭게 된다. 이러한 의는 사도바울이 옛날에 여호와 믿을 때의 생각했던 규칙과 법칙과는 완전히 다른 노선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성령 안 받으면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안 받고 교회 오게 되면 주님하고 자꾸 타협을 하고 흥정을 하는 방법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비나리’ 라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판소리 있죠? 이 비나리의 명인이 누구냐면 이 광수라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김덕수 사물놀이 패하고 처음에 사물놀이를 만들었는데 이 사람은 자살했는데 그때 멤버입니다. 그 사람이 그때 비나리라는 굿 장단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하는데 그 가사에 보면 ‘염불 말씀 따로 없소. 착한 마음이 염불 말씀’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착한 마음, 불교에서는 염불 염불하지만 진짜 염불은 착한 마음 이게 부처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몽골리안의 민속신앙입니다. 이것은 모두 갖고 있습니다. 이게 한민족이 갖고 있던 민족 신앙입니다. 예수고 하나님이고 맘 착하면 복 받습니다. 제발 이것이 교회 와서 뒤집어져야 되는데 교회는 이걸 뒤집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다 소스만 살짝 발라놨습니다. 그래서 돈 문제 터지면 다 날아가 버립니다.

사람은 그 시대 사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시대 사람입니다. 미래 살 수도 없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세종대왕 시대로 돌아갈 수 없고 이순신 시대로 돌아갈 수 없고 그 시대가 만들어준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가 만들어 준다는 우리의 자리는 이미 그 시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자리에 그냥 숟가락만 그 식탁에 하나 걸쳐놓았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즉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오시든 천사가 오든 성령이 오든지 간에 우리로 하여금 이질적인 존재로 바꾸어줘야 됩니다. 그 이질적인 존재가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했던 믿음과 전혀 다른 내용의 믿음이 들어가야 됩니다.

공관복음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질 것이다.” 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의 수준이 어떤 것이냐 하면 ‘산보고 들려서 동해바다에 빠져라’ 해서 바다에 빠지는 그 정도의 믿음이 제일 작은 믿음입니다. 제일 작은 믿음이 그 정도입니다.

자, 그러면 어떤 사람이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산을 바다에 빠뜨렸습니다. 이제 중요합니다. 빠뜨렸으면 그 사람은 그 다음에 어떻게 돼요? 또 다음날에 시험 또 해봐야 돼요. 왜, 분명히 어제 했는데 오늘 ‘나무야 뽑혀라. 바다에 빠져라.’ 해서 오늘 안 되면 어떻게 돼요? 마지막 남은 그 기대치마저 날아 간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왜 믿음을 그렇게 정리하시냐 하면 믿음은 우리가 생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지거나 할 성질의 그런 사물이나 물건이나 상품적인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을 품고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만일 내가 컵을 바다에 빠지라 해서 빠질 때 사람들이 박수치면서 ‘야, 이 목사님 성령 받았다. 놀랍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방금 그렇게 하신 당신 죽인다.’ 하면 겁냅니다.

그러니 진짜 기적은 뭐냐? 죽었다가 부활을 해버리면 이것은 콩나물 뽑듯이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 더 큰 결과물을 우리한테 뒤집어씌운 것이 됩니다. 이것은 죽었다가 부활인데 부활이란 내가 죽었다가 내가 사는 것이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 아는 사람 내가 별로 못 봤습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이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무덤에서 나오신 것이 부활입니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나와야 부활입니다. 나에게서 나오면 그건 소생입니다. 베드로 장모가 부활했습니까? 소생했습니까? 소생했거든요.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 첫 번째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장모가 부활되면 안 돼요. 에녹이 부활되면 안 되고 엘리야가 부활의 첫 열매되면 안 됩니다.

예수님 속에 들어갔다가 기어 나와야 부활입니다. 나이 칠십까지 살다가 죽었다가 나흘 만에 나사로처럼 살아도 그것 부활이 아닙니다. 소생은 장차 올 부활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생사건을 유발시킨 것입니다. 마치 물 여섯 동이가 포도주로 변한 것처럼, 포도주가 좋다고 ‘부활됐다.’ 이러겠어요? 그건 포도주 된 거지 부활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부활은 그런 것입니다. 물이 뭐로 변한다? 포도주로 변한다. 이건 질이 다릅니다. 그 질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하는 부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과 다릅니다.

주의 약속의 말씀에 의해서 부활되기 때문에 내가 기대하는 내 약속은 주님의 약속의 내용 앞에서 포기해야 됩니다. 내 약속, 어떤 약속? 보름달 보고 비는 약속 있잖아요. 우리 남편 사업 잘되고 애들 건강하고 하루 종일 비는 것을 포기해야 됩니다. 연말 되면 걱정된다. 교회마다 헌금내고 주머니에서 말씀 뽑아서 올해 주시는 말씀이라고 해서. 아, 그게 보름달 비는 것과 똑같아요. 다를 게 없습니다. 쥐불놀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약속에 관심 없고 자기 약속에 관심 있습니다. 그 자기 약속은 자기 과거의 한 맺힌 데서 가져왔습니다. 자기 역사의 노선, 행함의 노선들. 어릴 때 누구한테 버림받은 그 한은 복수를 낳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 복수심으로 보는 사람이 거의 90%가 넘습니다. ‘돈 없다고 무시했지? 내가 하나님 백성 돼서 너 지옥 보낼 거야.’ 이것이 한 맺혀서 하는 짓입니다. 그건 자기가 부활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자기가 죽지를 안했습니다. 자기가 안 죽었으니까 자기만을 위한 천국, 가짜 천국을 자기가 만들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았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때가 안 돼서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뭐 때가 됐는데 ‘삐져서 안 줍니다.’ 그게 아닙니다. 때가 안 되었고 그래서 열매가 없었는데 주님께서는 저주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무화과나무는 저주받기 위해서 무화과나무가 돼야 되듯이 어떤 사람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나야 됩니다. 그 사람이 죄 짓고 이런 것 묻지 마세요. 죄 져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저주받기 위해서 죄 지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착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야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약속이 아니고 주님이 알고 있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만 이것을 이해합니다. 내 쪽에서 주님께 다가서면 내가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나의 역사 속에 편입을 시켜버립니다. 자기 역사는 양보 안 하고 ‘주님까지 믿었으니 주님이 내 하는 일에 좀 보태줘야죠’ 라는 식입니다. ‘그 대신 십일조는 섭섭잖게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자기역사는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어디 집어넣었습니까? 사자 굴에 집어넣었습니다. 사자 굴에 집어넣었을 때 다니엘과 사자 중 누가 더 셉니까? 6장 24절 읽어보세요. “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 사자가 배가 고프기도 어지간히 고팠나 봅니다.

느부갓네살 왕 때 풀무 불에 다니엘의 세 친구를 집어넣을 때 자기들은 안 타죽으려고 온갖 무장을 했는데 다 타죽었습니다. 그런데 24절에 처자는 왜 죽입니까? 다니엘을 고소하고 다니엘을 험담했던 사람들 집안 일족을 모두 사자 굴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자가 정상적인 사자입니까? 비정상적인 사자였습니까? 정상적이죠. 사자가 브라우니처럼 말도 못하고 그런 건 아닙니다. 사자는 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럼 누가 비정상이냐? 정상적인 물리적인 법칙, 자연세계, 물리학으로 따질 수 있는 이 법칙은 아무 하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현상을 어려운 말로 ‘초과’라 합니다. 이런 말이 어려워요. 이것을 비정상이라 하면 말 표현이 안 돼서 ‘초과했다.’ 라고 표현합니다. 초과했다 하는 것은 현대적인 과학적 법칙으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다와 바람보고 꾸짖었다고 했잖아요? 바람과 바다가 ‘아이쿠’ 머리 긁는 것도 아니고 물 분자 아닙니까? 물 분자인데 왜 꾸짖어요? 수소 결합된 물 분자인데. 그게 무슨 죄가 있어요? 에너지에 의해서 풍랑 쳤는데, 에너지보고 탓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물에게 꾸짖으니까 순종하죠. 이것은 마치 바다가 괴물 같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준비했는데 이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습니다. 짐승과 비 짐승이 만날 때는 숨어있는 자리가 필요 합니다. 나중에 짐승을 표현할 때 사자, 독수리, 이렇게 표현하지 않고 몸통은 사자인데 날개는 독수리 날개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이질적인 것이 섞일 때는 평범한 물리적 상황에서는 이것이 섞인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에서는 섞이지 않을 것들이 결합을 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조자체를 바꿔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금 종이에 글자가 써 있는데 글자가 정상으로 써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종이를 구겨버리면 글자가 어떻게 됩니까? 글자가 구겨지겠죠. 여기에서 글자는 아무 일 없었는데 바탕의 종이가 문제입니다. 거울이 있는데 누가 와서 거울을 깼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울을 보니 못생겨도 너무 못생겼어요. 그런데 거울을 자세히 보니 거울이 깨졌어요. 이렇게 바탕 자체를 뒤틀리게 함으로서 그 위에 정상이라고 장담하는 인간들을 뒤틀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을 본받고 겸손 합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야 합니다.’ 라고 설교하던 그 목사가 퇴직금, 돈 문제가 섞이니까 갑자기 딴 소리 합니다. ‘내가 와서 얼마나 크게 키웠는데, 현금이 얼만데 이것만 주느냐?’ 라고 합니다. 그 목사가 점잖은 모습이지만 밑바닥이 협곡이 되니까 그 사람도 같이 뒤틀려버린 것입니다. 밑이 구겨지니 위의 그림도 같이 구겨집니다. 다니엘은 이것을 팔짱 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게 축복입니다.

세상을 볼 때 영적인 안목에서, 주님의 계시적 안목으로 봐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추상적이니까 구체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지셨던 그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미리 보는 것이 다니엘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성령을 미리 받았다 했습니다. 미리 받은 성령 때문에 예수님을 고난 받게 하는 그 세상이 이런 이유 때문에 나한테 고난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식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성도는 이미 십자가 이후이기 때문에 ‘아!’ 세상이 이래서 우리는 이 세상이 복음을 가리는 것으로 세상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범사에 감사한 것이 아니고 감사할 것을 끄집어내서 감사하는 이런 왜곡된 것들이 들어옵니다. 입는 것, 먹는 것 족한 줄 알라 해도 그건 기본이고 다른 것이 자기 원대로 안 된다고 원망하는 이 모든 왜곡된 것들이 바로 십자가를 자기 집으로, 자기 빌라로 삼아버립니다. 그러면 십자가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 바깥세상을 볼 때 그들의 뒤틀어진 모든 면들이 같이 다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7장 4절 봅시다. “첫째는 사자 같은데 독수리 날개가 있더니” 이게 사자 같은 독수리 날개, 원래 사자면 사자고 독수리면 독수리입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종류의 신체성이 한 몸체에 붙어있다는 것은 이것이 붙어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모여 있는 것인지.

집단인가, 아니면 집합인가? 집합이라 하는 것은 버스 기다릴 때 사람들 모여 있는 것은 그냥 집합입니다. 서로 아는 사람 아닙니다. 그냥 버스만 바라보고 타는 것입니다. 그럼 동창회는 어떻게 됩니까? 서로의 수다가 시작되죠. 그때는 하나의 일체성을 느끼잖아요. 가족도 그렇고 그것은 집단이 됩니다. 집합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그런데 집단은 무서워요. 왜냐하면 집단은 개인의 특성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담배 피는 고등학생 한명 있으면 ‘야, 너 어느 고등학교야?’ 하면 ‘잘못했어요.’ 합니다. 그런데 2명이나 3명 있으면 ‘아저씨가 뭔데 그러느냐?’ 고 나옵니다. 그것 보면 참 신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짐승이 됩니다. 짐승.

이질적인 것들이 본인도 모르게 동일한 목적으로 자아가 갖고 있는 자아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1+1이 2가 아니고 1+2가 되고, 2+3이 5가 아니고 2+3이 8이 됩니다. 이것은 더하기 법칙이 아니고 곱하기 법칙입니다. 수학에서 더하기라 하는 것은 이런 수직선, 수평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수학에서 곱하기라 하는 것은 항상 a곱하기b(a x b)는 한 변이 a고 이쪽이 b면인 면적을 의미합니다. 분명히 자기는 하나의 선상에 있지만 기대하는 것은 자기보다 이만큼 많은 면적 속으로 공짜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하기는 짜증납니다. 은행 이자 줘도 짜증납니다. 곱하기로 들어갑니다. 나는 하나지만 내가 소속된 것이 크면 나는 나를 버리고 소속 전체를 마치 나의 대체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릴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이단 단체나 교회 등 모든 단체는 이렇게 예상 밖의 초과, 잉여, 여분의 것, 이런 예상 밖의 그런 현상들을 낳아버립니다.

이것을 짐승들이 합니다. 정치란 짐승이 죽음의 구덩이를 파서 인간을 죽게 만드는 그 권력입니다. 그 정치 바닥을 드르륵 파면 그 구멍에서 인간을 그동안 배후 조정 했던 세력을 뽑아내는 그 지점이 정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