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9-14 21:53
다니엘 강의 제 8 강 b 이득없는 계시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926  

다니엘 강의 8강 b 이득없는 계시


관리자 15-09-14 21:53
답변  
제 8강b

주변에 있는 바사(페르시야) 나라를 하나님이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다니엘을 통해서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이 분출됩니다. 다니엘이 나서서 설치지도 않았는데 주변 환경이 다니엘로 하여금 가만있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성도가 되었으면 내가 전도한답시고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나는 가만히 있는데 주변에서 툭툭 쳐서 시비를 걸어옵니다. ‘그렇게 나쁜 짓해서 구원받겠느냐.’ 하는 식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착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착하지, 이런 것도 착하고 저런 것도 착하고, 난 예수 믿고 난 뒤에 착한 일만 했다. 나쁜 것은 생각도 안 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렇다면 성경말씀을 들이대 봅시다. “내가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실례하지만 자기목숨을 미워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니, 나는 내가 굉장히 좋은데. 나는 내가 너무 좋아.’ 그렇다면 누가복음 14장 26절에 어긋나잖아요. ‘자식을 사랑하십니까?’ ‘아휴, 우리 자식 사랑하지.’ 그러면 마태복음 10장에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에 어긋납니다. ‘남을 미워해 본 적 있습니까?’ ‘아휴, 가끔은 미워하죠.’ 그러면 살인했네요. ‘혹시 기도하면서 맹세한 적 있습니까?’ ‘맹세하죠. 맹세 하는 식으로 기도하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맹세하지 말라’ 는 것을 위반 했네요.

분명히 나는 예수 믿고 착한 일만 했다고 했는데 성경 말씀 직접 들이대 보니 전부 다 위반했습니다. ‘혹시 실례지만 아버지 장례식 때 장례 치렀습니까?’라고 물으면 ‘아버지 장례 치러야지.’ 그러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했는데 아버지 장례를 왜 치릅니까? 죽은 자을 그냥 놔 둬 버리지.

성경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기껏 있는 윤리 도덕 밖에 모릅니다. 선조들에게 배웠던 윤리 도덕적으로 내가 이 정도 선하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 선하면 신자답고 이 정도 악하면 안 되겠다 하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이것은 모형 즉, 옛날 율법 십계명 지키는 그런 때 있었습니다. 그런 것은 새로운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나로 인하여 누군가 피해를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나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었습니다. 그 정도로 나는 악한 자입니다.

잔소리만 해도 구원될 것 같지만 ‘너 같은 인간은 내가 대신 죽지 않으면 구원 안 돼. 왜냐하면 너는 강도보다 더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의 조합이 됩니다. 나는 죄인 되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바로 이것이 실제입니다. 따라서 다니엘을 잡으려는 작업을 시도하는 장면인 다니엘 6장은 모형입니다. 신하들이 법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 법은 순전히 다니엘 잡기위한 법입니다.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왜 다니엘을 잡으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왕 때문입니다. 사람은 칭찬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누가 잘한다고 하면 가만있어야 하는데 만인 앞에서 ‘다니엘 같은 사람 내가 못 봤다. 훌륭하다. 정말 다니엘은 인간의 지혜를 능가해.’ 이렇게 나오면 없는 적도 적을 만들게 됩니다.

옛날 어른들 하는 거짓말 중에 이런 거짓말이 있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나는 자식이 하나 밖에 없으니까 내가 그 자식 예쁜 건 알고 있는데, 자식이 둘되면 아마 상호간에 비교하지 싶어요. 형은 공부 잘하는데 너는 왜 농땡이냐. 동생은 건강한데 형은 왜 아파? 이런 식으로 자연적으로 편을 가릅니다. 아빠 엄마가 대놓고 물어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아예 대놓고 묻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나 자신은 무조건 신이 됩니다. 나는 모조건 절대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가장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가 기분이 좋을 때가 언제냐 하면 나를 독보적인 존재라고 누군가 부추겨줄 때입니다. 우리는 그 기쁨 때문에 교회 갑니다. ‘집사님, 최고입니다.’ 그런 소리 한 마디에 우리는 그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목회라는 것이 간단합니다. 사람들 칭찬만 잘 해주면 목회 잘 되며 부흥되게 되어 있습니다.

죄가 어떠니, 죄인이라 지적하는 이런 소리 하면 목회 안 됩니다. 칭찬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칭찬 받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헌금을 더 하게 하고 기도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목사 칭찬은 하나님 칭찬으로 등식을 그렇게 만듭니다. 그런 식으로 유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본인을 망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그렇게 특이하게 특급 대우를 해주니, 다른 신하들이 다니엘을 잡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법입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을 잡는 법은 다니엘이 하는 일 가운데서 다른 사람과 특이한 점, 다른 사람은 안 하는데 다니엘이 여호와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특이하게 하는 행위, 그것을 찾아내면 됩니다.

예수님 이야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둘로 나눕니다. 알곡과 가라지, 염소와 양,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왼쪽 오른 쪽, 전부 다 이렇게 둘로 나누십니다. 그렇다면 그 나누는 기준이 뭘까요? 교회 가는 일, 그것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많은 제자들이 예수께 왔다가 예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참 외롭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6:65).”

그렇다면 그 기준은 우리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준입니까? 아닙니까? 지금 그걸 묻는 것입니다. 내가 ‘나는 염소 싫어, 양이 되고 싶어. 나는 지옥 가기 싫어. 천국 가고 싶어. 나는 알곡 되고 싶고 가라지 되기 싫어.’ 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 기준을 우리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행위에 속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행위에서 벗어난 기준입니다. 왜냐 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어떤 소경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저 사람이 소경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제자들이 묻는 객관식 항목은  달랑 2개입니다. 자기 죄, 아니면 조상 죄, ‘설마 둘 중에 하나는 맞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 둘에 해당되지 않은 제 3의 항목을 제시하셨습니다. 자기 죄도 아니고 조상 죄도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소경되어야만 했다. 소경 되어서 태어나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해놓고 실제적으로 영광이란 말이 무엇으로 바뀝니까? 예수님께서 “실로암에 가서 이 진흙 바른 것을 씻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행위가 곧  아버지께 영광이 됩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한번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이여 내가 천국 가도록 작정된 것이 제 뜻은 아니죠?’ ‘아니지.’ 그래야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여, 나 지옥 가기 싫어요. 저 천국 갈 테니까 예수 믿게 해주세요. 손들게요.’ 예수 믿겠다고 손들고 교회 앞에 나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세례 받는 것, 그리고 성 만찬 떡 먹고 하는 것, 이것은 예수 믿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평소 우리가 교회서 하는 것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성도에게 발생되고 있는, 숨어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겨주시는 기준이 성경에 나옵니다. 로마서 8장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수능 점수 안 나오거나, 교회 교인 수 줄거나 헌금 안 나오거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정죄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따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보고 죄 있다고 고소하리요.” 송사나 고소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이기기 힘든 것은 자기가 자기를 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이기기 힘듭니다. ‘난 벌 받아야 돼. 난 벌 받아야 돼.’ 이런 짓을 우리가 멈출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인간 죽어도 마땅해. 이런 짓을 하다니.’ 이렇게 자책하는 것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책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자책은 ‘나는 부족합니다.’ 라고 바리새인들이 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자책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회개하는 그런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도 필요 없다.’ 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옛날 법에 의해서 옛 술을 옛 부대에 담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너희들의 술이라면 너희를 담는 부대는 사람들이 절대 생각 못하는 어떤 죄인도 구원이 되는 새로운 부대를 마련하셨습니다. 그 부대에 담아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자들이 강도, 세리입니다. 이들이 구원받았습니다.

신문지상에서 성폭행범이 징역 25년 받은 것을 보면 ‘저런 인간은 사형 정도가 아니고 아주 자근자근 밟아서 죽여야 됩니다. 그래도 그 피해가족들 아픔을 씻을 수가 없습니다. 저건 어떻게 쥐포를 만들어서 하든지 그냥 죽여서는 안된다.’ 라고 할 때 주님께서 우리보고 뭐라 했습니까? 남을 비판하는 자는 똑같은 기준에 의해서 비판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저 인간이 성폭행 한 것은 성폭행 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 들어갈 수밖에 없고, 네가 아직 성폭행 안 한 것은 네가 아직까지 성폭행할 만한 지경에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서 네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안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범사에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내가 지옥 가도 마땅한 상한 심령 맞습니다.’ 라는 것을 끄집어내는 그 작용에 우리가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잡는 법에 의해서 잡혔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다니엘이라면 여기서 어떤 반응을 보이면 좋겠습니까? ➀번 ‘하나님, 기도하지 말까요? 기도했으면 주께서 이렇게 수월하게 기도하도록 기적이란 축복을 주셔야지 이건 기도 했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죽임 당하게 되었으니 하나님 책임지세요.’ 이렇게 나올 수도 있고, ➁번 나라 법이 있으니까 나라 법도 법이고 그 나라를 이끄시는 분도 주의 권세를 입어야 되니 나는 나라의 법도 주님의 뜻이라 생각해서 한 두 달만 기도를 안 하겠습니다. ➂번 아무리 나라 법도 나라 법이지만 하나님 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기도는 하되 몰래 속으로 남한테 안 들키고 ‘하나님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셋 중에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들이 성경 모른다 치고, 성경에 해답 없다 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➀ ➁ ➂번 밖에 더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인간은 기어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근거로 내가 하나님께 복을 따내고 구원도 받으려고 하는 시도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➀ ➁ ➂번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창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아, 여기는 장목반, 장목반, 아, 아.’ 마이크를 소리를 크게 해서 기도 하니 기자들이 찰깍, 찰깍 사진 찍느라 난리 났습니다. 다니엘은 창문을 활짝 열고 평소에 하든대로 그렇게 하루 3번 씩 감사기도 했습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2번 했는데 그날 한 번 더 추가한 것도 아닙니다. 5번 하던 것을 3번으로 줄인 것도 아닙니다. 그냥 다니엘이 3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것은 다니엘 자신의 뜻이 아닙니다. 주께서 시키셔서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낫게 했습니다. 그 의미는 ‘세상이 그만큼 절망적이다.’는 말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며 귀머거리가 낫는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세상이 절망적이라는 것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나으며 절뚝발이가 걸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손이 필요치 않는 소경이 아니라고 우기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말이 좀 어렵게 됐죠? 누구든지 ‘나는 눈을 떠도 소경이고 귀가 들려도 귀머거리며 나는 걸어도 절름발이며 살아도 죽은 자입니다.’ 라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주님과 만나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소경 아닌데 주님이 뭐 필요해?’ 이렇게 나온다면 이미 그 사람은 지옥에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보는 것은 보지만, 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렇습니다. 사람이 소리는 듣고 있지만 듣고 있는 자기 자신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자기 뒤통수를 못 보듯이 아무리 애를 써도 들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하는 것만 생각하지 내 하는 것을 남들이 볼 때 어떻게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네가 일하고 공부하는 행동이 어떠냐를 미리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네가 어떤 행동을 해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밖에 없는 행동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너한테 딱 맞는 조치라는 말씀입니다.

보통 병원의 의사 선생님이나 약사 선생님이 뭐라 합니까? ‘식사 후 30분후에 약을 잡수세요.’ 라고 처방전을 내립니다. 주님이 내리는 처방전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피 없이는 너는 지옥 간다. 그 처방 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참, 이런 이야기하면 제가 가슴이 아픕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딴 이야기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 가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죕니다. 죄 짓지 맙시다. 여러분 이것이 이단이거든요. 우리는 이단 빠지지 말고 정통으로 갑시다.’ 이들은 결국 뭘 증거 한 것입니까? 우리의 바른 선택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 소리 밖에 더 되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는 이 기준은 내가 어떻게 변경하거나 어떻게 손을 댈 기준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 쪽에서 주님계신 하늘나라 가는 방법이 있다면 주님 앞에 헌금이고 뭐고 다 내놓고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심지어 베드로처럼 내 목숨 바쳐 가면서 천국 가겠다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서라 말아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야 네 목숨 바쳐도 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천국의 처소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 같은 경우처럼 자기 목숨 바쳐도 오지 말라는 곳이 천국입니다. 네 목숨 바친다고 해서 네가 구원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교회 충성해 봤자 우리 목숨 바치기까지는 안 합니다. 그 말은 곧 아무리 해봤자 교회만 살찌우고, 목사만 배불리는 것밖에 안 됩니다. 아무 짓도 안 한 것이 되고, 목사 가정만 밥 먹여 살린 것밖에 안 됩니다.

예수님이 딱 집어서 불러 줄 때는 항상 십자가로 불러주시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항상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찡그리면서? 아니죠.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이렇게 십자가로 밝히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에 이런 저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자기가 죄인된 것이 오히려 감사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자를 앞에 놔두고 주변에 둘러 싼 방청객들, 또는 심판자들 보고 뭐라 했습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고 하셨습니다. 그들 모두 다 갔습니다. 그러면 죄 있는 자가 그곳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는 여기 있잖아?’ 라는 말씀을 달리 둘러서 이야기합니다. “너 주위에 누가 있더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너 누구하고 대화하지?’ 그런 뜻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가 주위에 있더냐?" 뻔히 둘 다 보고 있으면서 다 아는 이야긴데 왜 묻습니까? ‘나는 너를 저들처럼 너를 고소하려고 너를 부른 것이 아니다. 너를 정죄하려고 부른 것이 아니다.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정죄 안 하기 위해서, 그냥 아버지께서 내게 보낸 자기 때문에, 그냥 받아주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와서 너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상징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0).”

이것은 평소 다니엘이 3번씩 기도한 것이 응답이 되느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기도하는 기계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은 기도하면서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해야 다니엘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다니엘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늘 느끼면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 기도가 자기 아이디어가 아니고 주께서 평소에 시키신 일관된 시나리오 속에 포함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루 3번씩 기도하는 시나리오를 먼저 깔아놓고 기도한 자를 잡아 죽이는 시나리오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저쪽 이방민족 바사나라를 통해서 이 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대목이 다니엘 6장의 내용입니다. 여기에 동굴에 있는 사자까지 동원됩니다. 다니엘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동굴 속 사자까지 동원시켜서 다니엘이 평소에 기도한 것이 다니엘 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 흉내 내서 ‘나는 하루 2번밖에 안 했는데 3번 하겠다.’ 이러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건축 설계사 책상 위에 있는 그때 그 당시의 모형일 뿐입니다. 지금은 기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기도 안 하면 미화원을 하든지 통장을 하든지, 주께서 시키면 통장도 해야 됩니다.

현재 내가 입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모든 것이 주의 뜻이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그 입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이 다 주의 일입니다. 자기 집에 콩나물 사서 먹는 것도 주께서 주신 헌금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 내는 것만 헌금이냐 말입니다. 자기 집에 침대 사고 애들 피아노 가르치고 콩나물 사먹고, 소고기 사먹어도 주의 돈으로 하는 것입니다. 또 사먹고 또 소고기 사먹고, 백날 하는 것이 다 주의 주신 돈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꼭 교회 내는 돈만 거룩한 돈이고 자기 쓰는 것은 나쁜 돈이고,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헌금하는 것이나 우리가 쓰는 모든 돈을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우리에게 용돈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햇빛 주죠. 공기주죠. 잠 잘 때 심장 뛰게 해주지, 위장 뛰게 해주지, 거기다가 비까지 내려주십니다. 눈까지 내려 주십니다.

다니엘이 살아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 작품입니다. 그것을 다니엘이 좋아하면 안 됩니다. ‘역시 나는 하나님 작품이야.’ 이러면 안 됩니다. 다니엘을 위해서 다니엘 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있어야 될 존재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다니엘은 숨어있는 분과 연결돼 있습니다. 숨어있는 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인간들의 무리, 인간들의 군집, 바사나라 안에서의 죄를 끄집어내서 다니엘이 갖고 있는 그 주님구원과 연계시키는 것입니다.

출애굽 할 때 애굽나라의 사정과 히브리인들의 사정을 엮어서 출애굽을 만들 듯이, 사사시대에는 사사 주변에 있는 블레셋과 사사와 연계해서 그 시대의 죄와 그 시대 구원을 따로 보여주듯이, 다니엘을 바사나라의 형편과 그리고 이쪽의 다니엘과 엮어서 구원을 보여줍니다. 바사나라는 120명의 총독을 거느리고 세금을 받음으로서 그들이 국가에 이득을 줍니다. 그들 총독이 국가에 이득을 주는데 다니엘은 어떤 이득을 주느냐 이 말입니다.

세상 왕들이 원하는 이득을 주지 않습니다. 이 바사나라를 실제적으로 운영하시고 존재케 하시는 분은 너희들의 하나님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도 아니고, 그냥 여호와도 아니고, 여기 다니엘 6장 26절에 나오는 ‘다니엘의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만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을 피해서 갈 수 있는 하나님은 우상에 불과합니다. 마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에게 여호와 믿는 것을 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의 하나님 여기에서 하나님 다 떼버리면 지상에 남겨놓는 흔적들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예레미야와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마지막 때는 누굴 증거 한다? 선지자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증거 하셨던 분이 마지막에는 누굴 통해서 증거 한다 했습니까? 오직 아들을 통해서 증거 한다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 2절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마지막 때는 예수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단지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시대가 마지막이라는 것이 판정 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임박한 진노의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올해가 끝나도 마지막이고 올해 겨울이 되어도 마지막이고, 가을이 되어도 마지막이고 내년 봄이 되어도 마지막입니다. 인간의 캘린더는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숨어있는 하나님께서 다니엘 주변에 일어나는 현상을 통해서 숨어있는 하나님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인간 세상 사람들은 어떤 기적을 원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기적을 베풀면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내가 제안하는 그 기적의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엉터리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십자가 달릴 때에 어떤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눈을 가리고 뺨을 때리면서 테스트합니다. ‘네가 진짜 메시아라면 우리 중에 누가 당신한테 귀싸대기 때렸게? 알아맞히면 믿어줄게.’ 이렇게 시험했습니다. 또 어느 강도가 시험했습니다.  ‘당신이 진짜 메시아라면 나를 이 십자가에서 내려 구원하면 나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줬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 내 테스트에 당신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내가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 이렇게 나온 것입니다.

‘복음과 기독교의 차이’라는 책 내용 중 ‘요즘 예수님은 오디션 받는 예수님이라고 나옵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면 믿어주고, 납득이 안 되면 이단, 마귀로 간주하는 그런 예수처럼 사람들에게 심사받는 예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가 원하는 것과 비교해 다 탈락시키고 마지막에 자기에게 맞는 예수님을 선택합니다. 이 정도로 오늘날 신앙은 엉망입니다.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가 맞느냐 하는 것은 광야에서 마귀가 이미 세 번식이나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돌이 떡 되게 해라. 그리고 성경말씀대로 기적을 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릴 때 천사가 와서 받아주면 내가 메시아로 인정하겠다고 했습니다. 나머지는 자기한테 절하면 모든 세상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세상 영광 싫어하는 인간 어디 있습니까? ‘예수 너도 마찬가지잖아. 산다는 것이 세상 부귀 영광 보고 사는 건데 그것 마다할 사람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나한테 절하면 너 원하는 것 다 줄게. 네 영혼을  나에게 팔아라.’ 그런 뜻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당신이 진짜 메시아라면 기적을 보여 달라.’ 참 이 말씀이 정말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기적 속에 이 세대, 예수님 자신에게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이 세대를 거기다 재료로 집어넣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니, 내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마16:4).’ 는 것입니다.

기적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만이 기적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저질로 살아가는 그것도 주님께서 이루시는 기적에 재료가 됩니다. 이것이 필수적으로 발생되어야 됩니다.. 절에 가는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교회 간다고 머리 쥐 뜯을 때, 며느리는 기도하기를 ‘어머니가 저렇게 날 핍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 기도하겠죠. 하지만 하나님쪽에서는 머리카락 잡아 뜯는 시어머니와 그래서 억울하게 당하고 사는 며느리가 모아져야 됩니다. 이 둘 다가 있어야 주의 기적의 재료가 됩니다.

이미 기적은 종결됐습니다. 요나의 기적은 끝났습니다. 다른 기적 바라면 안 됩니다. 암 낫고 그런 게 아니고 기적은 끝났습니다. 요나의 기적뿐입니다. 요나의 기적이 뭐냐? 세 자로 하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생이 아닙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생명은 오히려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나 봐라, 생명도 아닌 그 생명에 맞아 내가 죽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사흘 만에 참된 생명으로 살려내셨다. 그러니 너도 나처럼 가짜 죽음을 빨리 벗어버려야 된다.’ 고 하십니다.

사도바울의 소원이 그것입니다. 이 되지도 않는 생명(목숨)이라고 걸치고 있는 가짜 생명을 홀랑 빨리 벗고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입니다. 사도바울의 소원이 남북통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애 성적 올라가고 딸, 아들 시집 장가가는 게 소원이 아닙니다. 빨리 이 육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벗어버리고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얼마나 지독하게 사랑했으면 그 그리운 사람과 함께 있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니엘이 창문을 열고 기도한 것은 결국 누가 보고 싶다는 것입니까? 이처럼 나를 파견근무 시켜놓고 우리로 하여금 바사나라에서 살게 하시는 주님이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어서 나를 편하게 해 달라. 주님 책임지세요.’ 라고 주님 바라보는 그 마음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딴 것이 아닙니다. 저 죽으렵니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지금 쌀 떨어졌거든요. 쌀 있어야 되니까 쌀 주시고, 그 다음에 차비도 좀 주셔야 되겠고.’ 이렇게 기도하면 주께서 뭐라 하는지 알아요? ‘너한테 있어야 할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런 이방인의 기도는 하지 마라.’ 고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는 자기 기도가 예수님을 이 땅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높습니까?’ 라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마시는 쓴 잔을 제자들이 마실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조치를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기어이 주님의 쓴잔을 마시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하는 말이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내가 지금 감당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복음 전하는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너희들을 살리기 위해서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득불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이 나의 상품이다. 착한 일 한다고 보너스 받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고난 받는 이것이 바로 주께서 내게 주신 상장과 상품이다. 이것 행한다고 상 받는 것이 아니라 이 자체가 상이 된다.”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받은 면류관을 주의 발 앞에 다 던져서 반납해 버리고, ‘제가 쓰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라고 합니다.

상급에 무슨 차등이 있습니까? 차등은 없습니다. 현재 내가 어떤 꼬락서니로 살더라도 내가 보기에는 참 초라해 보이고 창기요, 세리요, 도둑놈이요, 강도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완벽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완벽한 것을 우리는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델을 세상에서 찾으니 그렇습니다. 가정 화목하고 돈 잘 벌고 인물 잘나고, 키는 180되고, 전부 다 이런 데서 찾습니다. 요새 아가씨들 결혼하기 힘듭니다. 복음 알면 된다 해놓고, 막상 소개하면 키가 작고 성격이 안 맞고 어떠하다고 말합니다. 안 좋은 대학 나왔고, 아버지가 교회 안 다니시고 온갖 것 다 따집니다.

다니엘이 하나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기존의 모델도 그랬지만 이번 일을 통해서 다니엘이 모델로 하나 더 첨가 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존재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존재는 장차 오실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을 부를 때  다니엘이라고 하지 않고 人子라고 부릅니다. 이 人子라는 명칭이 다니엘 300년 이후에 예수님에게 붙여집니다. 人子야, 그럼 예수님이 하는 기능 속에 뭐가 담겨 있다? 다니엘에게 일어난 일이 예수님 속에 그대로 다 담겨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관련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유다나라는 다니엘 입장에서 무슨 나라가 되겠습니까? 바사나라가 됩니다. 바사나라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장차 예수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라에 앞서 먼저 시범 보인 일입니다.

그런데 바사나라라고 했지만 바사나라도 무슨 나라의 연장이라 했습니까? 바벨론의 연장입니다. 현재 모든 나라는 ‘바벨론, 바벨론, 바벨론, 바벨론 바벨론이 됩니다. 금 신상 다음에 은, 은 다음에 놋, 놋 다음에 철, 철 다음에 진흙과 철이 혼합된 그런 것은 금 신상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다루는 법칙에서 어떤 세상 나라도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바벨론 나라 속에 다니엘이 있는 것처럼, 똑같은 법칙 안에 다니엘 같은 운명을 가져야 될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날 교회고 오늘날 이스라엘입니다. 이제는 교회란 말은 하기가 힘듭니다. 교회가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참된 성령께서 다니엘과 함께 계시니 다니엘 이야기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은 결국은 ‘다니엘 네가 있는 환경이 너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에, 너는 그 환경 속에서 주께서 시키는 대로, 만들어주신 대로 살아라.’ 그 말입니다. 살면서 주님이 어떻게 나로 하여금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시는지, 구원을 해내시는지, 심지어 인큐베이터까지 역할을 하는 주변의 이단들과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공격케 해서라도 기어이 작품 하나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나는 오직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교인들이 나와 줬으면 좋겠습니다. 맨날 교회 자랑, 신앙의 연조 자랑, 자기 성화된 거 자랑, 선교비 내는 자랑, 교회 섬겨서 자기 자식 잘 된 자랑, 아파트 넓힌 자랑, 차 바꾼 자랑, 교인 수 늘은 자랑, 헌금 자랑, 그런 것 좀 자랑하지 말고 십자가만 자랑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중에 강한 사람이 누가 있으며, 우리가 잘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고린도전서 1장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반대입니다. ‘부러워라’ 약한 자를 통해서 강한 자를 부러워하게 하시고 이렇습니까? 없는 걸 택하사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게 하시고, 이렇습니까? 없는 걸 택하사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아이구, 인간, 또 집 샀어? 아이구, 안 됐어, 안 됐어.’ 이렇게 모든 것이 반대, 거꾸로 입니다. 교회에서 축복이라는 것을 반대로 이야기해야 됩니다. 저주가 축복이고 축복이 저주입니다. 전부 다 뒤집어 버립니다. 자기 사랑밖에 모릅니다. 인간은 자기 사랑밖에 모르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그리고 바사나라의 종교에서 고레스 왕은 마르둑 신이었습니다. 마르둑 신은 천지 창조할 때에 어둠과 빛이 싸워서 천지 창조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 보면 창조할 때 싸움한 것이 아니고 ‘빛이 있으라,’ 하매 그냥 빛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해와 달은 알아요. 시편 19편에 보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이것은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서로 저희들끼리 통합니다. 저주파인지 고주파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소리가 주께서 친히 우리를 다스리고 만들어내서 이끄십니다라는 소리입니다. 참새도 알아요. 참새도 주께서 친히 기르시고 들의 들풀도 주께서 기르시는지 압니다. 그런데 유독 잘났다는 인간만큼은 솔로몬의 옷가지고 자랑하고, 키 크려고 애쓰고, 자기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잡초가 악이 아니고 참새가 나쁜 참새가 아닙니다. 나쁜 놈은 누굽니까? 선악과 따먹어서 안에 마귀 들어있는 인간들입니다. 하나님께 대드는, 하나님을 피해자로 만들고 있는 그런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인간들입니다. 그 앞잡이가 바로 서 있는 저나 여러분들입니다.

주께서 손을 대줘야 우리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주께서 손을 안 대주면 우리는 복음 알았다고 자기 잘난 체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매일같이 주께서 매질을 하셔야 됩니다. 주께서 손가락 집어넣어 한 손으로는 등을 두드리면서 “빨리 토해내, 아이쿠, 술도 어지간히 처먹었어. 이렇게 처먹으니까……” 하면서 늘 등을 두드려가면서 우리 속에 있는 악마적인 요소를 계속해서 토해서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제가 상한 심령입니다.’ 라는 이러한 엮음, 이러한 조합, 죄인과 의인의 엮임이 있는 이런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할 수 없고 우리 주변의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냅니다. 그 환경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환경이냐? 다니엘을 잡아 죽이는 법입니다. 누굴 잡아 죽인다? 다니엘 죽이기입니다. 그러면 이 법을 위반한 국회의원들, 당시에 다른 라이벌 총독들, 라이벌 고위 간부들은 현재 건재합니다. 아무 탈이 없습니다. 이 법은 오직 다니엘을 조지는 법입니다. 다니엘과 달리 사람들은 법을 잘 지켜서 자기 목숨을 살리려고 합니다.

이 법은 다니엘이 다른 사람과 달리 하나님 믿는 것 때문에 행하는 특이한 행동을 문제 삼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특이한 것, 예수님 같으면 뭐가 특이합니까? 다른 사람은 다 살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혼자 자꾸 죽으려고 하는 그 특이한 것, 그 특이한 것 때문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했습니다. ‘저 미쳤어. 미쳤어. 법을 지키면 되는데 왜 자꾸 법도 지키지 않고 죽는다 해. 이상해, 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왜 자꾸 죽으려고 이야기하느냐.’

그렇다면 여기 다니엘을 죽이려고 다니엘을 공격하는 사람들, 법을 안 지켜서 죽기 직전에 있는 다니엘, 그리고 우리가 다니엘과 아는 친구나 다니엘과 동거하는 다니엘을 좋게 보는 사람 같으면 이중에서 누가 부럽습니까? 다니엘은 안 부럽죠? 왜냐하면 곧 죽기 때문입니다. 누가 부럽습니까? 권력을 쥐고 있는 다니엘을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그 사람들이 더 좋아 보입니다. ‘저 사람 좋겠다. 다치지도 않고 직장 생활 잘 할 수 있고.’ 그런 부러움이 오늘날 우리 속에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사나라입니다. 바사나라의 신하들입니다. ‘아휴, 내가 이만큼 예수 믿었으면 이제 전세방이라도 옮기게 넉넉하게 주시지, 집도 옮겨야 되고 겨울에 추운데 보일러도 깔아야 되겠고, 아휴, 저 사람 좋겠다. 하하 웃으면서 보일러 팍팍 돌아간다. 그런데 나는 기름 값 아낀다고 비닐을 온 창문에 다 바르고 이것은 토굴도 아니고.’ 우린 예수 믿는 것이 하나도 안 부럽습니다. 예수 잘 믿는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예수 믿든 안 믿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부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 복음 전하는 교회가 안 부럽고 헌금 많이 나오는 교회가 부러운 것입니다. 큰 교회 다니는 내가 부러운 것입니다. 돈도 안 나오는 개척교회는 안 부럽습니다.

우리는 다니엘 속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니엘 잡아 죽이는 바사나라의 속성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샘솟듯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제사 신학교 학생들에게 ‘제발 스데반집사를 부러워하세요.’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부러워합니다. ‘여러분, 스데반집사 성령이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부럽죠?’ 하니까 안 부럽대요. 얼마 전에 차 바꾼 교회 당회장 목사들이 부러운 것입니다.

결국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기는 굉장히 쉬습니다. ‘이렇게 이 말씀 지키시고 이렇게 시키는 대로 하시면 복 받습니다. 좌편에는 건강이요. 우편에는 부귀요. 말씀대로 됩니다. 말씀을 믿어야 됩니다. 말씀대로 다 될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능치 못할 게 없습니다.’ 자꾸 이렇게 해서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바사나라의 속성을 맘껏 유발시켜서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축복은 “내 이름으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옛날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고생을 했느니라.” 좁은 길로 가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바사나라가 좋기 때문입니다. 나는 바벨론이 좋고 헬라가 좋습니다. 왜냐함녀 이 나라는 항상 승리합니다. 남한테 꿀릴 것도 없고 십일조 해서 카아네기처럼 부자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카아네기의 십일조는 십일조가 아니고 세금 포탈 용도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람들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쨌든 부자 됐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속에 잠자고 있는 마귀를 목사들이 자극시켜서 그것을 주의 뜻이라고, 축복이라고 유인합니다. 우리는 그게 아닌 줄 알면서도 그 소리가 듣고 싶어서 오늘도 보람찬 하루 주일 날 교회에 나옵니다. 그 희망과 비전과 꿈을 제공하는 교회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망하지 않는다는 사상이 바사나라뿐만 아니라 지금도 하늘을 덮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 은근히 반 장난삼아, 재미삼아, 혹시나 될까봐, 로또복권 당첨되기를 은근히 기대합니다. ‘저 십자가 아니까 주께서 내가 원하는 것 아시죠? 십자가 아니까 아쉬운 것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우리 힘으로 구원이 안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진다는 것, 그리고 이 초라한 이 모습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한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갈 수 있는 그 몸이라는 것을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니엘 모습 보면서 우리가 그 시대 있으면 다니엘을 욕하고 다니엘에게 돌 던지고 다니엘을 반대하는 자들에 편승해서 다니엘을 잡아 죽이는 자들과 한패인 것을 저희가 알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주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좋아하는 우리 모습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발각되게 해주시고, 그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보혈의 피가 유효함을, 효력이 있음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